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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정치의 죽음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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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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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앎과 민중의 느낌이 만날 때 ‘대안적 상식’의 지평을 연다. 이를 포착하는 게 정치 부활의 시작이다
정치의 부활은 작금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문제, 그리고 그 세계에서 좋은 삶을 위한 도덕에 대한 고찰이 꼭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의 부활은 그저 ‘거짓 웃음’만 짓는 행위로 끝나고, ‘부활 없는 몰가치한 죽음’을 가져온다

최근 들어 특히 많은 사람들이 정치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정치의 실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 특히’라는 표현은 직접적으로는 윤석열 정권의 출범 이후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요즘 정치에 대해 말하기를 성가셔 한다. 정치학자들마저 그리한다. 최근 학회에서 배제와 혐오의 정치 혹은 양극화된 정치를 주제로 삼고 그 해법을 논할 때조차 지금의 정치가 실제 나아질 것이라는 열망과 기대를 갖고 있는지 자기들 스스로 회의한다. 정치부 기자들은 쓸 만한 기사거리조차 없다고 한탄한다.

경향신문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정치의 죽음 혹은 실종의 연원은 시간적으로 그리 가까운 곳에만 있지 않다. 윤석열 정권의 출범 이후로 시기를 한정하는 것은 현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대략 어이없는’ 통치행태에 주로 초점을 맞춘 것이다. 부실 및 편향 인사와 물가 및 금리 인상 등 민생 문제 해결에 있어서의 전반적인 무능, 그리고 불공정 채용 시비 등 쟁점이 된 사안에 대한 상식과 괴리된 인식과 오만한 태도가 그것이다. 출범 석 달 만에 20% 초반대로 떨어진 윤 대통령의 낮은 지지도를 문제 삼고 그 이유를 찾는 접근이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그걸 갖고 정치의 죽음을 논하는 것은 제한적이다. 윤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과 대통령답지도 집권세력답지도 못한 행태는 정치의 죽음을 논할 아주 작은 소재는 될 수 있을지언정 본체일 수 없다. 정치의 죽음에 대한 언사의 횡행은 대통령제만의 현상도 아니고, 어제오늘만의 일도 아니다.

국회 역시 마찬가지다. 야당이자 원내 1당인 더불어민주당에 대해서는 지지율의 등락에 상관없이 비관적인 시선이 대부분이다. 서민의 고통 해소를 위한 대안 제시의 책임자이면서도 ‘어대명이냐 확대명이냐’ 외에는 아무런 쟁점도 없는 지도부 경선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집권당인 국민의힘과는 물론이고, 최근 한층 더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정의당 같은 세력에 대해서는 또 어떠한가. 사람들이 안중에 두고 있는지조차 불확실하다. 그래서 결국 각기 다른 형태로 모두가 자신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난리법석이지만 다수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다.

하지만 작금에 거론되는 정치의 죽음은 보다 근원적인 관찰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한국 혹은 어떤 특정 나라만의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과 일본 등 한때 정치선진국이라고 불렸던 나라들에서도 정치의 죽음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제기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민주주의 위기론과 포퓰리즘론의 유행이다. 정치는 선거와 같은 형식적 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지배층 혹은 기득권층의 사익추구를 법·제도적으로 정당화하는 의례가 되었고, 익명의 성에 사는 군중의 욕망과 분노와 공격성을 조장하고 표출해주는 대가로 표를 얻는 게임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결국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상호 견제와 균형과 조화와는 거리가 먼 강자(승자)독식의 질서 속에서 약자들의 행복추구권을 훼손함은 물론이고, 인간적 존엄성과 개체성의 압살을 낳고 있다.

세계는 지금 ‘적대의 그물망’ 갇혀

최근에는 이런 논의들마저 한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현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바로 ‘전쟁’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은 주지하다시피 양국만의 전쟁이 아니다. 또 그 여파는 생명의 위협에만 머물지 않는다. 미국·유럽 대 러시아·중국을 축으로 하는 신냉전적 대립 구도가 만들어지고 있다. 사실상 전 세계가 그 영향권 안에 놓여 있다. 게다가 식량과 에너지 수급 등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주 개척을 위한 국가 간 협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온통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대의 그물망’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중에 핵무기는 물론이고, 인공지능과 로켓 기술 등 과학기술의 발전마저 적대의 그물망 속에 갇힐 공산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한층 더 심각하게 만드는 사안은 또 있다. 과학기술의 비약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와 같이 어느 한 국가나 진영이 홀로 해결할 수 없는 전 지구 차원에서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돌이켜보면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전후로 해서 급증한 이주·난민 문제와 인종차별과 같은 문제는 그런 적대의 그물망을 짜내는 일련의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유럽과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에 걸쳐 극우 포퓰리즘 정치세력을 등장시킨 사회경제적·계급적 불평등 같은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적대의 그물망은 시간 초월적이고 공간 초월적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적대의 그물망은 무척 광대하고 촘촘해 견고할 수밖에 없고, 정치는 그 안에서 사실상 작동이 불가능하다. 특히 견제와 균형과 조화라는 ‘공화주의적 사유’에 기초한 정치는 그렇다. 그런데도 굳이 정치가 가능하다 말하려면 옛 경구들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전쟁은 다른 수단을 가지고 지속하는 정치”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언명 혹은 그 역인 “정치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연속”이라는 미셀 푸코의 언명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치가 우리가 원하는 정치인가?

적대의 그물망에 갇힌 세계에서 한국은 여전히 ‘분단과 전쟁 중’인 나라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해 왔으며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켜왔다. 물론 그런 중에도 경제적·군사적으로 세계 10위권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그런 위상의 나라들 중에서 행복지수가 턱없이 낮은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연대에 바탕을 둔 국가통합성도 매우 취약한 형편이다. 오래 지속되어온 현실이기에 각종 기관에서 발표하는 이러저러한 수치와 그에 기초한 사회해체론 같은 진단과 경고는 이제 진부하기까지 하다.

정치의 죽음은 사유의 부재가 문제

정치의 죽음은 바로 그런 맥락과 현실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유의 부재라는 문제이다. 정치의 죽음과 관련해 윤석열 정권을 비롯한 지금의 정치세력들을 문제 삼으려면 저런 현실과 맞닿아 있는 사유, 즉 인간의 실존적 위기와 문명세계의 붕괴 가능성 전체에 대한 통찰의 흔적, 즉 그와 관련된 담론과 전략과 정책의 부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아니, 부재는 허용해줘야 한다. 그런 사유는 하루아침에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유의 시도 혹은 그것을 쟁점으로 삼는 목적의식적 실천의 부재에 대해서는 엄하게 대해야 한다. 진정 정치의 부활을 꿈꾼다면 그렇다.

혹자는 반문할지 모른다. 그런 “사유는 정치인의 몫이 아니라, 철학자의 몫이 아니냐”고. 이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바로 그런 관점이 정치를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정치와 철학을 분리하고 철학을 “특정 분야의 직업과 작업으로 치부하는 순간부터 정치는 죽음의 길에 들어섰다”고. 정치가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내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발현시키는 실천일 수 있는 이유는 사상과 이념 때문이다. 마음과 행동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때조차 그렇다. 애덤 스미스가 발견한 ‘경제적 이익추구자로서의 인간’이라는 사유에 대해 도덕성을 배제한 왜곡된 해석에 기초해 등장시킨 ‘자본주의적 자유주의’가 과잉노동착취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정치마저 가능케 했던 것처럼. 좋은 사상과 이념은 자유주의의 그런 천박한 해석을 추종하는 것을 넘어서는 ‘보다 현명한 길’을 찾는 실천으로서의 철학에서 나온다. 그 철학의 핵심에는 우주와 세계와 인간 존재의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그것들의 총체적 관계 형태로서의 문명 질서에 대한 물음과 이해가 있다. 그런데 철학은 고귀한 학자들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삶과 직관에서 잉태한다. 정치에서 철학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했던 이탈리아의 혁명 정치인 그람시가 지식인의 앎(knowing)과 민중의 느낌(feeling)이 만날 때 ‘대안적 상식’의 지평을 연다고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그 느낌에 대한 파악의 책임이 바로 정치에 있다. 이를 포착하는 게 바로 정치 부활의 시작이다.

정계개편에 대한 암중모색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윤석열 정권의 무능함에 위기감을 느낀 여권 일각의 수도권 (보수)신당론 등이 그것이다. 분당마저 감수하겠다는 친명세력의 이재명 민주당론과 (친문) 반명 세력 간의 결사항쟁설도 들었다. 정의당 재창당론(해체론) 혹은 민주당과의 통합 불가피론도 들었다. 정치하는 자들 나름의 이유가 있기에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지 않다. 그러나 당부는 해야 한다. 작금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문제, 그리고 그 세계에서 좋은 삶을 위한 자기 책임의 윤리와 그것의 수행 과정에서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의 문제를 다루는 도덕에 대한 고찰이 꼭 동반되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정치의 부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러면 쉼보르스카가 시 ‘미소’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치가 그저 ‘거짓 웃음’만 짓는 행위로 끝나리라는 것을. 아니, 그것에도 못 가고 거짓 슬픔과 화로 그치리라는 것을. 그 웃음, 슬픔, 화 모두가 ‘부활 없는 몰가치한 죽음’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김윤철

경희대 교수 및 실천교육센터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세계와 시민’ ‘정치의 인문학적 탐색’ 등의 과목을 가르친다.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 ‘시민과 세계’ 편집위원,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 노회찬정치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정당> <헬조선 3년상> 등의 저서와 ‘노동존중 정치와 노회찬의 6411정신’ ‘한국 불평등 민주주의의 정치사적 기원’ 등의 논문이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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