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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재난 격차’ 폭우도 판자촌 구룡마을엔 더 가혹했다 [수도권 115년 만에 물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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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살 평생 맞아온 비보다 어젯밤에 30분 동안 맞은 비가 더 많은 것 같다.”

지난 8일 밤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판자촌 ‘구룡마을’. 이곳에 35년째 거주하고 있는 조모(70)씨는 문틈으로 집 안에 들어오는 빗물을 밖으로 빼내는 ‘사투’를 벌였다. 비가 갑자기 집 안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찰나였다. 거동이 불편한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은 뒤 여유롭게 방송을 볼 때였다. 함께 사는 아들은 집에 없고 일을 하던 중이었다. 빗줄기가 더 거세지는 소리에 불안감이 높아졌다. 그간 종종 폭우가 내리면 침수피해를 보던 낡고 오래된 판잣집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빗물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번엔 전과 달랐다. 눈 깜짝할 새에 빗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날 강남은 시간당 강수량 100㎜ 이상을 기록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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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구룡마을 판잣집에 전날 밤 내린 폭우로 쓰러진 채 방치돼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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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동이 불편한 남편 생각에 조씨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냄비, 물통 등 여러 물건을 가지고 최대한 집으로 들어오는 물을 밖으로 퍼 날랐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거실에서 물을 퍼내던 조씨는 집 담벼락 틈을 급하게 ‘보수공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언제까지 집 안에서 들어오는 물만 퍼낼 수는 없었다. 빗물이 ‘1차 저지선’인 담벼락 사이로 통과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밖으로 나간 조씨는 담벼락 틈에 흙을 채우고, 돌을 주워 놓고, 모래주머니를 찾아 닥치는 대로 막았다. 응급처치를 한 시간은 30분. 폭우 속에서 보낸 그 시간은 조씨가 평생 맞아온 비보다 많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조씨는 집이 잠기지 않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빗물을 퍼냈다. 새벽 사이 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어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평소 서울의 한 지하철역에서 청소를 하며 소득을 얻는 조씨는 밤을 새운 뒤 지저분해진 집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채 출근길에 나섰다. 9일 오후 4시 퇴근한 조씨는 곧장 서울 강남구 구룡중학교 체육관을 찾았다. 이곳엔 전날 폭우로 인해 집에 물이 차고 무너지는 등 구룡마을의 이재민을 위한 대피소가 마련돼 있었다.

조씨는 대피소 관계자가 지정해 준 구호텐트에 들어가 남편과 아들까지 3명을 위한 자리를 정리했다. 관계자가 스티로폼 매트리스를 갖고 오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정리를 이어가던 그는 급하게 짐을 챙기며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폭우가 더 예상된 만큼, 더는 판잣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아들과 집을 정리하고 거동이 불편한 남편을 대피소에 데리고 와야만 했다. 남편의 저녁밥도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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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서울 강남구 구룡중학교 체육관에 폭우 피해 이재민을 위한 구호텐트가 설치가 되어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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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밤을 새우며 빗물을 퍼냈지만 계속 그럴 수 있나요. 비가 계속 온다는 데 일단 피해야지. 여기 자리 잡았으니까 빨리 가서 아들이랑 남편을 데리고 와야죠.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할지 모르지만 참 막막하네요.”

서울·수도권 등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115년 만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면서 곳곳에서 피해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은 강남·서초 ·관악∙동작구 등 남쪽 지역을 중심으로 비가 집중적으로 내려 큰 피해를 입었다. 다만, 그 피해의 정도는 ‘어디에 사는가’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비가 ‘낮은’ 곳으로 흐르듯, 폭우 피해는 우리 사회 ‘낮은’ 곳을 향해 매섭게 파고들었다.

폭우로 인해 삶의 터전에 피해를 본 것은 조씨네 뿐만이 아니다. 서울 강남 지역에 큰 피해를 남긴 폭우는 지대가 낮고, 낮은 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구룡마을에 더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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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구룡마을 판잣집 앞에 침수를 피하기 위한 쌓아둔 박스들이 눈에 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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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마을엔 밤사이 물이 들어차고 전기와 수도가 끊기면서 주민들은 큰 불편을 겪고, 급히 몸을 피해야 하는 순간이 이어졌다. 고립되는 상황으로 인해 119구조대원들이 출동해 구조하기까지 했다. 대모산과 구룡산을 뒷산으로 끼고 있는 구룡마을은 빗물이 마치 계곡 물처럼 흘러내렸다. 길은 토사물이 내려와 형태가 달라질 정도로 엉망이 됐다. 대피소 관계자에 따르면 구룡마을 이재민 170여명이 집이 물에 잠기거나 무너져 대피소를 찾았다.

70대 남성 송모씨는 8일 밤 폭우가 내리자 곧장 대피소로 왔다. 단순히 빗물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토사물이 함께 섞여 집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송씨의 집은 뒷산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위험을 감지한 그는 더는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송씨는 “마치 계곡 물이 집을 치는 느낌이었다. 철물점에서 마대자루를 사서 모래를 채워 급하게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며 “집을 잃고 여기 대피소에 있으니 마음이 좋겠나. 구청에서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복구계획을 세워 하루빨리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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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구룡마을 주민이 전날 밤 내린 폭우로 침수된 집안 물건들을 세척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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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모(68)씨는 구룡마을을 뒤덮은 빗물이 처음엔 ‘검은색’이었다고 설명했다. 겨울에 대부분 연탄불에 의존하는 마을은 연탄이 집집마다 있는데, 연탄들이 빗물에 휩쓸려 섞이면서 빗물의 색마저 바꾼 것이다. 폭우 속에서 긴 밤을 보낸 김씨는 다음 날 일을 마치고 바로 대피소를 찾았다. 그는 “토사물로 인해 길이 막히는 등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검은색 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 섬뜩함도 느꼈다”면서 “이 마을에 살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

구룡마을 이재민들처럼 이번 폭우로 인한 침수피해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은 수도권에만 441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민들은 대부분 인근 학교, 체육관, 주민센터 등으로 몸을 피했다.

폭우가 계속 내린다는 소식은 이재민들을 더욱 불안에 떨게 만든다. 이날 오후 6시30분쯤 잠잠하던 비가 갑자기 또 쏟아지자 대피소에 있던 구룡마을 이재민들의 불안감은 더 커졌다. 한 명, 두 명. 이재민들은 밖으로 나와 하늘에 구멍 뚫린 듯 쏟아지는 비를 원망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장한서 기자 jh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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