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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해현장서 딱 찍힌 ‘파안대소’… 독일·한국 정치인의 그 후[더블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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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지난해 7월 독일 수해 현장에서 대통령이 발언하는 도중 뒤에서 웃는 아르민 라셰트 당시 기독민주당 대표. /트위터


#1. 2021년 7월 독일 서부지역에 100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180명 넘는 사람이 숨진 대규모 참사였다.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연방 대통령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재난 현장을 찾았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침울한 표정으로 피해 주민들을 위로했다.

문제는 그의 ‘뒤’에 있었다. 메르켈의 후임자로 평가받던 아르민 라셰트 집권 기독민주당 대표가 웃고 떠드는 모습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라셰트는 심지어 피해 상황이 심각한 지역의 주지사였다.

그의 모습은 분노를 일으켰다. ‘라셰트가 웃는다’는 뜻의 해시태그는 트위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가 됐다. 독일 네티즌들은 “장례식장에서 살인마와 농담을 하는 것과 같다” “엄마가 없으면 정신 못 차리는 아들 같다” 등의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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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동작구 수해 피해 지역을 찾은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 등 여당 의원들이 농담을 하며 웃고 있다.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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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22년 8월 8일 서울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80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이후 충청 지역으로 물 폭탄이 이어졌고, 14일 오전 11시까지 잠정 집계된 인명 피해는 사망 14명, 실종 6명이다.

수도권에 비가 그친 직후인 지난 11일 여당 비대위원장을 비롯한 원내대표와 의원들이 서울 동작구 수해 피해 지역을 찾았다.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은 이곳에서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라고 말했다.

장소를 나경원 전 의원이 당협위원장으로 있는 동작구로 선택한 배경을 두고는 농담이 오갔다. 권성동 원내대표가 “원래 강남 터미널을 가려고 했는데 거기는 거의 다 완료가 됐다고 하더라”고 말하자 옆에서 “나경원 지역이라고 오신 거구나”라고 농담을 던졌다. 권 원내대표는 “딱 보니까, 나경원 아니면 바꾸려고 그랬지. (나경원한테) 꼼짝 못하니까”라고 대꾸했고, 현장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뜬금없는 외모 품평도 나왔다. 나 전 의원이 작업용 장화를 신기 위해 230㎜ 사이즈를 찾는 과정에서 한 남성 의원은 “여성 발이 너무 큰 것도 좀 보기가 (그렇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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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독일의 수해 지역을 찾은 아르민 라셰트 집권 기독민주당 대표가 웃는 모습이 '2021의 사진'으로 선정됐다. /St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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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해 보이는 두 상황은 이후 다르게 흘러간다.

라셰트는 사과를 하고 또 했다. 웃는 모습이 찍힌 날 저녁 “대화 상황에서 나온 모습에 후회한다”며 “부적절했고 죄송하다”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여론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총선을 두 달 정도 앞둔 시점에서 라셰트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라셰트는 홍수 피해 복구에 전념하겠다며 선거운동마저 잠정 연기하며 자숙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포스트 메르켈’은 올라프 숄츠 사회민주당 대표가 차지했다. 라셰트보다 안정적인 이미지 덕분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독일 주간지 슈테언은 ‘2021년의 사진’ 중 하나로 라셰트가 혀를 살짝 내밀고 웃는 모습을 꼽았다. 슈테언은 “라셰트가 홍수 지역에서 부적절하게 웃음을 터뜨린 걸 운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며 “그가 패배한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아마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1년이 지나서도 라셰트는 당시의 행동이 후회된다며 사과했다. 지난달 라셰트는 RTL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해를 입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앉아 울기도 했다”며 “몇 초의 웃는 상황만 기억된다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여전히 후회되고 미안해하고 있지만 지울 수는 없는 사진”이라고 했다. 억울함을 이야기했지만, 최소한 남 탓을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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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동작구 수해 현장을 찾은 주호영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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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한국에서는 어땠을까. 철없는 발언으로 처음 논란이 된 김 의원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하루도 안 돼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이 낮아서였을까. 다른 의원들의 함박웃음은 당시에는 주목조차 끌지 못했다.

집권당의 최고 책임자는 되레 역정을 냈다. 주호영 비대위원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여러분들 노는 데 가서 우리가 찍어보면 나오는 것 없는 줄 아나”라고 했다. 작은 것 하나하나 트집 잡지 말라는 뜻이었다. 현장에 있던 다른 의원들은 침묵했다. 독일에서는 1년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꼬리표’로 남은 사건이지만 한국에서는 하루면 잊힐 거라 생각한 걸까.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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