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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공산당원들 '뜨거운 동지애' 풍자한 러 화가 브루벨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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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1990년 '형제의 키스' 그려

1979년 브레즈네프·호네커 입맞춤 사진에서 착안

"神이여, 살아남게 도와주소서" 신랄한 야유 담아

독일의 옛 베를린 장벽 터에 가면 꼭 ‘인증샷’을 찍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벽화 ‘형제의 키스’(1990)를 그린 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이 14일(현지시간) 독일에서 6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러시아 타스통신 보도에 따르면 고인의 부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남편의 임종을 알리며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부인은 지난달 SNS 게시물에서 고인이 코로나19에서 회복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또 “(코로나19 발병 후) 심장이 갑자기 많이 약해졌다”고 소개했다. 일부 외신은 “고인이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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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의 명물인 벽화 ‘형제의 키스’ 앞에 선 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 사진은 2009년 오래돼 칠이 벗겨지는 등 훼손된 그림을 복원할 때의 모습이다. 게티이미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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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1960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국립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했다는 점 말고는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다. 최근 몇 년간은 가족과도 떨어져 독일 베를린에서 살아왔다. ‘형제의 그림’ 탄생 25주년을 맞은 2015년 고인은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과거 소련의 문제는 공산주의 바로 그 자체라고 여겼다”며 “하지만 공산주의가 사라진 뒤 지금의 러시아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적 억압, 부정부패, 사상과 표현의 자유 제약 등을 거론하며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부인이 우크라이나 오데사 출신이라고 공개하며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의 우크라이나 공격도 비판했다. 인터뷰가 이뤄진 2015년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름(크림)반도를 강제로 병합한 이듬해였다.

‘형제의 키스’는 고인을 비롯해 세계 21개국 118명의 작가가 베를린 장벽 붕괴의 기쁨을 표현하고자 1990년 그린 작품들로 조성된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에 위치해 있다. 이제는 베를린의 대표적 관광명소가 된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여러 작품 중에서도 꼭 눈으로 확인하고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그림이 바로 ‘형제의 키스’다.

그림 속 주인공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1906∼1982)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에리히 호네커(1912∼1994)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다. 브레즈네프는 1964년부터 1982년 사망 시점까지 소련의 최고권력자로 있으면서 미국 등 서방을 상대로 강경책을 폈다. 전임자 니키타 흐루쇼프 시절 조금 누그러졌던 동서 냉전은 브레즈네프의 등장을 계기로 다시 첨예해졌고, 미·소 간 대결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정점에 달했다.

호네커는 1971년 소련의 위성국이나 다름없던 동독의 최고권력자가 되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까지 재임했다. 브레즈네프 노선에 충실하게 동독을 공산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단단히 묶어놓았다. 그가 동독을 다스리던 시절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각종 범죄의 책임을 지고 동독 붕괴와 동시에 자리에서 쫓겨났다. 독일 통일 후 재판을 받다가 건강 악화를 이유로 칠레로 망명해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림은 이 두 사람이 연인처럼 서로 포옹한 채 뜨거운 키스를 하는 장면을 담았다. 고인은 1979년 동독 건국 30주년을 맞아 당시 동독을 방문한 브레즈네프가 호네커와 공산주의 지도자들 특유의 화기애애한 환영 인사를 나누던 광경에 착안해 이 그림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냉전 시절 공산주의 국가 정상들끼리 만나면 동지애를 보여주기 위해 껴안고 볼에 키스를 퍼붓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는데, 아주 드물긴 하지만 상대방의 볼 대신 입술에 키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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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이 벽화 ‘형제의 키스’를 구상하는 계기가 된 사진. 1979년 동독 건국 30주년을 맞아 동독을 방문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왼쪽)이 에리히 호네커 당시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격렬한 입맞춤을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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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키스’는 냉전 시절 소련·동독 두 나라 지도자들이 공산주의 이념으로 똘똘 뭉쳐 자국 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토록 공산주의라는 대의에 충성했으나 소련도, 동독도 지금은 다 망하고 없다. 그림에 달린 ‘주여, 이 치명적인 사랑을 이겨내고 살아남게 도와주소서’라는 부제는 공산주의 이념을 추종한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하는 점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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