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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경제숙고] 반지하가 아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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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16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주택가에 위치한 반지하 가구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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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한 여성 개그맨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반지하에 살던 때 경험을 털어놨다. 샤워할 때 습기를 빼려 화장실 창문을 열어 놨는데, 샤워 도중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창문이 닫혀 있었다는 것이다. 출연자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누군가 닫힌 창문을 열었다면 범죄였겠지만, 반대의 상황이라 개그 소재가 됐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개그맨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창문이 열렸든 닫혔든 그는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순간 살 떨리는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하다. 반지하에 살지 않았다면 분명 안 해도 됐을 경험이다.

외부로부터 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막 같은 곳, 집은 그런 곳이다. 월세로 살든, 전세든, 얹혀 살든, 내 명의든, 반지하든, 아파트든 더할 나위 없는 안전이 보장돼야 하는 공간이다. 최근 집중 호우가 덮쳐 일가족이 목숨을 잃은 서울 신림동과 50대 여성이 숨진 상도동 반지하 주택도 마찬가지였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반지하만 아니었다면 피할 수도 있었을 비극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참변 직후 서울시가 지하나 반지하를 사람이 사는 '주거 용도'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이른바 '반지하 퇴출 선언'을 했다. 곧바로 비판이 쏟아졌다. 성급한 반지하 폐지 선언이 오히려 취약계층의 주거 안정성을 흔들 수 있고, 침수에 취약한 게 문제지 반지하라고 다 위험한 것도 아니며, 반지하 주택을 가진 집주인 또는 건물주들의 재산권도 중요하다는 식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고 숙고해야 할 경제적 논리다. 하지만 반지하를 없애겠다는 건, 애초부터 사람 사는 공간으로 적합하지 않았던 공간을 없애 나가겠다는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주거기본법에서 정한 최저주거기준에도 '주택은 적절한 방음, 환기, 채광 및 난방 설비를 갖추고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한 위험이 현저한 지역에 위치해선 안 된다'고 나와 있다. 지하나 반지하를 겨냥한 규정이나 다름없다.

방음, 환기, 채광에 취약한 고층(高層)도 없지 않다. 홍수로 인한 인명피해가 꼭 반지하에서만 일어나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반지하는 인간의 생명 혹은 건강권과 직결된 저 간단치 않은 문제들을 태생적으로 안고 있다. 반지하에 살 수밖에 없는 각자의 사정이 있고, 정부가 나서 이 사정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일대일 맞춤형 대책을 내놓기란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대표적인 주거취약계층의 태생적인 위험에 손 놓고 있을 수만도 없다. 2020년 기준 서울 시내에 사는 전체 가구 백(100)에 다섯(5%), 약 20만 호가 지하·반지하다.

서울시는 반지하를 순차적으로 없애기 위해 20년간 공공임대주택 23만 호 이상을 확보하고, 지상층으로 이사할 때 월세를 20만 원씩 최장 2년간 지급하기로 했다. 국토교통부도 반지하 등 재해 취약 주택을 사들여 공공임대로 리모델링하는 방안을 포함해 관련 종합 대책을 올 연말까지 내놓기로 한 상태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이미 2020년 3월 '(반)지하 주거 현황과 시사점'이란 보고서에서 "(반)지하 주거를 선택하는 이유가 저렴한 임대료 때문이란 점을 감안해 공공임대주택 공급, 저리의 전월세 자금 지원 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침수 피해를 틈타 나온 반지하 폐지 선언은 성급한 게 아니라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조아름 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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