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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고종 황제 경호원은 왜 해시계를 품고 다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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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소재문화재재단, 18일 ‘일영원구’ 공개

고종의 호위무관 상직현의 제작품으로 밝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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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처음 확인된 휴대용 해시계 ‘일영원구’. 둥근 공 모양의 반구 두개가 맞물린 몸체와 기둥, 받침으로 이뤄져 있다. 1890년 고종의 호위무사였던 상직현이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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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직현(尙稷鉉)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19세기 말 고종 임금 곁을 지켰던 호위무사 ‘별장’(別將)의 낯선 이름이 문화재 동네의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그가 품에 넣고 다니며 경호 일정을 맞추는 데 썼으리라 추정되는 휴대용 해시계가 미국을 떠돌다 고국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 3월 미국 현지 경매에서 19세기 말 고종의 호위군관을 지낸 상직현의 낙관이 새겨진 휴대용 해시계 ‘일영원구’(日影圓球)를 낙찰받아 환수했다고 18일 발표했다.

이날 오전 서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언론에 공개될 예정인 ‘일영원구’는 국내에서 처음 확인된 휴대용 해시계다. 동과 철로 만들었는데, 높이 23.8㎝, 지름 11.2㎝인 둥근 공 모양의 반구 두개가 맞물린 몸체(구체)와 기둥, 받침으로 이뤄져 있다.

한쪽 반구에 ‘대조선 개국 499년 경인년 7월 상순에 새로 만들었다’(大朝鮮開國四百九十九年庚寅七月上澣新製)는 명문 기록과 함께 ‘상직현인’(尙稷鉉印)이란 도장 날인이 새겨져, 1890년 7월 상직현이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면 그는 고종의 곁을 지킨 측근 무관이었다. 고종 재위기 국왕의 호위와 궁궐, 도성의 방어를 맡은 군사기관인 총어영(摠禦營)의 군관 직위인인 별장과 별군직(別軍職) 등에 임명됐던 당대의 특급 경호원이었다.

고종을 밀착경호한 상직현은 해시계를 품에 넣고 다니면서 어떻게 시간을 쟀을까. 일영원구의 시간 측정 방식은 자못 흥미롭다. 우선 구체 표면엔 시시각각 각도가 바뀌는 햇빛을 받아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때를 일러주는 뾰족한 막대 모양의 영침(影針)이 붙어있다. 구체의 한쪽 반구에는 12지의 명문과 96칸의 세로선으로 시각을 표시해 놓았다. 하루를 12시 96각(刻·15분)으로 표기한 조선 후기의 시각법을 따른 것이다. 이채로운 건 반구의 정오(正午) 표시 부분에 뚫린 ‘시보창’(時報窓)이란 구멍이다. 시시각각 바뀌는 태양 움직임에 따라 다른 쪽 반구를 움직이면, 이 구멍에 12지의 시간 표시인 시패(時牌)가 나타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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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해시계 ‘일영원구’의 한쪽 반구 표면. 한가운데 ‘정오’(正午) 표시 아래에 둥근 구멍인 시보창(時報窓)이 뚫려 있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쪽 반구를 움직이면, 이 창에 12지의 시간 표시인 시패(時牌)가 나타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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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 알려진 조선시대의 대형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는 한 지역의 시간만 측정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일영원구는 둥근 공 모양의 반구 두개가 다양한 각도로 맞물려 움직이면서 각종 장치로 위도를 조정해 어느 지역에서나 시간을 잴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햇빛을 받는 구체 아래쪽 받침기둥의 다림줄로 해시계가 안정된 수평 상태에 놓였는지를 가늠해 맞추고, 나침반으로 방위를 측정해 북쪽을 향하게 한 뒤 구체에 달린 조절 장치로 위도를 조정할 수 있게 했다. 이어 구체 표면에 일자로 파인 홈 속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대(횡량)의 그림자를 홈 속에 들어가도록 움직여 맞추는 방식으로 현지시각을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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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원구’의 몸체 옆에 달린 위도 조절 장치. 이 장치를 조작해 어느 지역에서든 시간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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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원구’의 몸체 표면에 일자로 파인 홈 속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대(횡량)의 모습이다. 햇빛에 비친 걸대의 그림자가 홈 속에 들어가도록 걸대를 움직여 맞추는 방식으로 현지시각을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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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는 일영원구가 국보인 조선 전기의 자격루와 혼천시계에도 보이는 12지 시간 알림 장치를 둔 점에서 조선의 전통 과학기술을 계승했다고 평가하면서 국외 교류가 급증한 구한말 상황에 맞게 다른 나라에서도 쓸 수 있도록 고안한 유물로 추정하고 있다.

금속공예품의 미감 또한 뛰어나다. 구체를 받친 기둥 아래 쪽 받침판은 네개의 꽃잎 모양이다. 여기에 은으로 된 문양을 새겨 넣는 상감입사기법으로 시각을 상징하는 日(일)·月(월)이란 글자와 항해중인 배의 모습을 표현해 예술적 품격까지 갖췄다.

이 유물이 어떻게 나라 밖으로 흘러나갔는지는 모른다. 원래 소장자가 일본 주둔 미군 장교였으며, 그가 숨진 뒤 유족한테서 개인소장가가 입수해 경매에 냈다는 정보만 알려졌다. 재단은 지난해 말 유물의 경매 출품 정보를 입수한 뒤 관련 문헌 등을 조사하며 환수 준비 작업을 벌였고, 지난 3월 미국 현지의 한 경매에서 유물을 낙찰받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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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원구’의 몸체를 받친 기둥 아래 쪽 받침판은 네개의 꽃잎 모양이다. 은으로 된 문양을 새겨 넣는 상감입사기법으로 시각을 상징하는 日(일)·月(월)이란 글자와 항해중인 배의 모습을 표현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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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시계를 품에 갖고 다니며 고종 곁을 지켰던 호위무사 상직현은 생몰연대를 모르지만, 여러모로 눈에 띄는 행적을 역사 기록에 남겨놓았다. 1881년에 조선 정부의 일본 견문시찰단인 수신사 일행으로 파견돼 현지에서 근대 문물을 접했고, 이후 지방관직인 적성현감과 창원부사를 거쳐 1888~1897년 고종의 측근 경호원인 별장과 별군직을 수행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은 덕분인지 1903년 대한제국의 국방 무기 관리를 담당하는 군부 포공국장에 임명되는데, 재직 당시 대한제국 최초의 증기선 군함 양무호를 일본 미쓰이물산으로부터 사들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의 아들 상운은 근대 전기기술을 배운 엔지니어로 청나라에 영선사로 파견돼 국내 최초로 전화기를 들여온 주역이기도 했다. 이런 사실들로 미뤄 상직현은 독창적 발명품인 일영원구를 품에 지닐 만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영원구는 19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문화재청은 이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문화재 환수 특별전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새달 25일까지)에 지난달 환수된 조선 왕실 유물 ‘보록’과 함께 추가 출품작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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