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침묵·소송·해고… 하이트진로가 믿는 구석 ‘하청 노조니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브레이크 없는 손배소 하]

하이트진로 손배소 소장 보니

하청 노조의 교섭 요구를

“악의적인 분쟁”이라며 소송

본사 점거 조합원 경찰 고소


한겨레

운송료 인상을 내걸고 지난 6월 2일부터 파업을 벌이고 있는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 하이트진로지부 노조원들이 16일 오후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하이트진로 본사 사옥 옥상 광고판과 1층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우리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몸의 표현’을 쓴 것뿐입니다. 회사가 교섭 자리에 나와주면 지금이라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요….”

공공운수노동조합 화물연대본부 하이트진로지부가 지난 16일부터 사흘째 서울 강남구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진행 중인 가운데, 이진수 부지부장은 18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이번 사태의 가장 쉽고 빠른 해법은 ‘교섭’이라고 말했다. 노조는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에 설치된 소주 광고판에 ‘노조탄압 분쇄’, ‘손배·가압류 철회’, ‘해고철회 전원복직’이라고 쓴 대형 걸개를 걸어두고 건물 로비와 옥상 점거 농성을 하고 있다.

‘불법파업’ 전엔 교섭하지 않는 원청


통상 노조의 쟁의행위는 점거·고공농성으로 나아가는 순간 기업과 정부로부터 ‘불법행위’로 지탄을 받는다. 민·형사상 책임을 지게 될 위험 부담도 크다. 그런데도 노동조합이 이런 쟁의 방식을 택하는 배경엔 특수고용직과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 사용자를 상대로 단체교섭 및 쟁의행위를 할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 이를 악용해 불성실한 교섭으로 일관하는 기업이 있다. 하이트진로 화물기사들의 파업과 점거농성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하이트진로가 지난 6월 조합원 11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소장을 확인해 보니, 하이트진로는 지난 4월 최근 유가 급등에 따른 운송료 30% 인상 요구 등을 담은 노조의 ‘교섭 요구 공문’을 받았음에도 “화물차주들과 교섭할 법적 책임이나 채무가 없다”는 이유로 현재까지 4개월 간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화물기사들과) 아무런 계약 관계가 없다”는 문구를 소장에서 네 번이나 사용했다. 또 노조가 이 회사의 주류 운송업무를 위탁받은 자회사 ‘수양물류’나 정부가 아닌 하이트진로를 향해 교섭을 요구하는 것은 “악의적인 분쟁”이라고 썼다. 노조가 충북 청주·경기 이천 공장에서 제품 출고를 막으며 파업을 이어가자, 하이트진로는 노조를 상대로 27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과 부동산 가압류 신청을 냈다. 수양물류는 파업에 참여한 조합원 130여명에 대해 계약도 해지했다. 하이트진로는 수양물류 지분을 100% 보유한 데다 하이트진로 임원이 수양물류 임원도 겸직하고 있어 사실상 노조 요구에 답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법적 의무만을 강조하며 교섭에 응하지 않고 소송과 해고(계약해지)로 대응한 것이다.

하이트진로는 자회사 수양물류의 운송료 협상에 관여하면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 제45조의 ‘부당한 경영간섭’(거래상대방의 생산량이나 거래 내용 등을 제한하는 행위)이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김종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화주이자 실질적인 운송비 부담 주체인 하이트진로가 운송료 협상에 관여하는 것을 공정거래법상 부당한 경영간섭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18일 서울 강남경찰서에 따르면 하이트진로는 본사 옥상에서 농성 중인 조합원들을 업무방해·특수주거침입 및 퇴거 불응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이는 임금 인상을 요구해 온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이 거제 옥포조선소 제 1도크(배 만드는 작업장)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청 노조는 6월2일 하청 사용자들을 상대로 절차와 내용을 모두 갖춘 합법 파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하청업체가 사실상 임금 인상을 결정할 권한이 없었고, 권한을 쥔 원청은 책임 당사자가 아니라며 대화를 거부하면서 6월22일부터 조선소 점거로 농성 방식을 바꿨다.

정당한 쟁의행위 지나치게 좁힌 대법원 판례


2001년 대법원은 ‘정당한 쟁의행위’의 기준을 목적·수단·내용·절차 등으로 세세하게 정하면서 쟁의행위가 가능한 주체도 ‘단체교섭의 주체’로 한정했다. 여기서 단체교섭의 주체는 통상 ‘한 사업장 내 노사’(근로계약관계에 있는 노사·1995년 대법원 판례)로 한정됐다. 그러다 보니 사내 하청 노동자처럼 원청 사용자가 사실상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경우마저 단체교섭과 쟁의행위의 주체에서 빠지곤 했다. 지난해 6월 중앙노동위원회가 ‘원청 사용자도 단체교섭 의무를 진다’는 취지의 판정을 내린 바 있으나, 이는 행정법원에서 처분의 효력을 다투고 있다. 하이트진로 등이 ‘교섭을 안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근거이자, 노동계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동조합법)상의 사용자 개념을 원청 사용자까지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노조가 불법행위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제반 사정은 법원의 손해배상 소송 심리 과정에서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 앞선 2001년 대법원 판례에 따라 하급심 법원은 먼저 노조의 쟁의행위가 이런 기준에 부합한 지 따진 뒤, 정당한 쟁의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기업의 손해액과 과실을 따져 노조의 최종 배상 비율을 정한다. 이 과정에서 교섭을 게을리 한 원청 사용자의 책임 등은 배상 비율을 정하는 보조 근거로만 활용될 뿐이다.

2010년 현대자동차가 사내 하청 노조의 공장 점거에 대해 90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하청 노동자 최병승씨가 불법파견 소송으로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음에도 현대차는 사내 하청지회의 특별교섭 요구에 불응했다. 하청업체 폐업에 따른 해고 문제에도 답하지 않았다. 1·2심 재판부는 “현대차가 단체교섭을 할 수도 있었다”면서도 “공장 점거 방식이 불법”이라며 노조의 배상 책임을 90억원으로 확정했다. 재판부는 심리 과정에서 현대차의 사태 악화 책임 등을 물어 배상액을 손해액의 60%로 정했다. 그러면서도 ‘손배소 청구금액이 고정비 손실 271억원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현대차의 주장과 증빙 내역을 받아들여 배상액을 줄이지 않았다. 노조는 수천만원의 인지송달료 등 법률비용에 부담을 느껴 상고하지 못했고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불법파업 판결 전, 사쪽 교섭 의무 적극적으로 판단해야”


전문가들은 쟁의행위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다루는 법원의 접근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윤지영 변호사는 “쟁의행위에 설사 과정상의 불법이 있었더라도 그 배경엔 회사의 책임이 있는데 법원은 그런 사정을 피상적으로만 참작한다”며 “쟁의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할 때도 원청 사용자가 실질적인 사용자로서 단체교섭에 임할 의무가 없었는지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한겨레>기자들이 직접 보내는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동물 사랑? 애니멀피플을 빼놓곤 말할 수 없죠▶▶주말에도 당신과 함께, 한겨레 S-레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