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고르바초프의 개혁 마인드와 북한의 미래 [남성욱의 동북아 포커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990년 목격한 붕괴 직전 소련 혼란상에도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올바른 평가받아야
북한 개혁·개방에도 필독서로 활용되어야
한국일보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왼쪽)이 공산당 서기장 시절인 1987년 12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을 처음 방문해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90년 11월 말 냉기가 가득한 모스크바 공항은 아수라장이었다. 대형 이민 가방을 싸 들고 소련을 떠나려는 인파로 인산인해였다.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를 방불케 할 정도로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출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1917년 레닌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 체제의 경직된 통제에 신물이 난 인재들이 고국을 등지고 떠났다. 푸틴의 예비군 즉각 동원령으로 탈출 러시인 작금의 사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초의 소련 방문은 전력난으로 입국장부터 대낮인데도 어두웠다.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무장 군인이 공항을 순찰하고 KGB 요원들의 검문검색이 이뤄졌다. 그해 6월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85년 만에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으나 한국 대사관 개관은 여전히 준비 중이었다. 대한무역진흥공사가 대사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대사관 개관 준비와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현장에서 관찰하고자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여장을 푼 인투리스트 호텔 로비에서는 캐비아(상어알)와 몸을 팔려는 매춘부 여인들과 휴지 조각으로 폭락한 루블화를 팔려는 환전상들이 관광객을 기다렸다. 혹한의 레닌그라드 트랙터 공장은 부품 부족으로 가동이 중단되었다. 보드카와 생필품을 구매하기 위한 긴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는 등 모스크바는 경제 위기로 신음하였다.

플래카드를 두른 시위자들이 영하 15도의 붉은 광장에서 연설 중인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요구하며 보리스 옐친이 권좌에 오를 것을 주장했다. 1985년 집권한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와 언론 자유를 허용하는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실시했다.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키고 동서독 통일을 용인했으며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다음 해에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전략핵무기 감축 합의에 서명했다.

역설적으로 그의 화려한 개혁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큰 벽에 부딪혔고 서기장에서 물러났다. 1996년 러시아 대선에 출마했으나 0.5%의 지지만을 받았다. 소련 몰락의 장본인이라는 주홍글씨가 발목을 잡았다. 인간의 탈을 쓴 마지막 로맨틱 공산주의자라는 닉네임을 가졌던 고르비는 개혁 과정에서 두 가지 민생 혼란을 경험했다.

첫째는 체제전환(transition) 과정에서 적당한 속도 조절에 실패하면서 나타난 혼란이다. 사회주의가 계획(plan)에서 시장(market)으로 한번 무대를 이동하면 완급 조절이 안 된다. 고삐 풀린 시장 기능이 급속하게 작동하고 관료제도의 부패 등으로 빈부 격차가 심해졌다. 둘째는 정치적 불안정이 경제 위기를 악화시켰다. 체제전환은 구세력과 개혁 세력이 공존하는 과정이다.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시장경제는 정경유착으로 불안해졌다.

고르비가 선한 의지를 가졌지만 70년의 공산주의 관행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매우 지난한 과제였다. 솔제니친의 '수용도 군도(群島)'와 같은 소련이 붕괴되고 개방된 러시아가 탄생했으나 국민들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국제정치에서 대화만이 해결책이라는 그의 어록은 러시아의 희망이자 비전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의 세계관은 30만 동원령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수렁으로 빠뜨리는 현재 크렘린의 지도자와는 차원이 다르다. '푸틴의 총알받이는 싫다'는 반전 시위의 확산은 러시아에 고르바초프의 철학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마인드는 향후 닥쳐 올 북한의 개혁 개방에 필독 교과서로 활용될 것이다. 핵무력 법령화를 채택한 평양의 미래는 모스크바의 과거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겠지만 말이다.

한국일보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 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