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4 (수)

[최영미의 어떤 시] [88] 푸르른 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1915~2000)

조선일보

송창식의 노래로 유명한 시. 아예 노래를 만들라고 지은 시 같다. 4행의 ‘초록이 지쳐’와 3행의 ‘저기 저기 저’는 똑같이 5음절. 가을 꽃 자리를 가리키려면 ‘저기 저’로 충분한데, ‘저기’를 한번 더 반복해 뒤에 오는 행과 운율이 완벽해졌다.

여고 시절 나의 애송시를 손으로 베껴 쓰다 “가을 꽃 자리” 뒤에 ‘초록이 짙어’를 입력하고는 아차! 내 기억의 잘못을 발견했다. ‘짙어’가 아니라 ‘지쳐’가 맞는다.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든다? 여름에서 가을로의 변화를 이보다 더 멋지게 표현할 수는 없다. 4행의 초록과 단풍을 지나 5행에 ‘눈이’ 내리고 6행에 ‘봄이’ 나온다. 짧은 시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들어있다.

결코 지칠 것 같지 않던 청춘, 푸르던 잎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태풍이 지난 뒤 맑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난 시. ’푸르른 날’ 한 편만으로도 시인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리라. 어떤 소재든 주물러 작품을 만드는 미당 선생의 무서운 솜씨.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