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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바다가 이상해져부렀어" 어민 한숨…가을 전어 '금전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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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뉴노멀-上] 뜨거운 바다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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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전남 광양시 망덕포구에서 한 어민이 이날 잡은 가을 전어를 들고 있다. 천권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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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뜨겁다니까요. 비도 안 오고 그래가꼬 바닷물도 시커매. 바다가 이상하게 바껴부렀어.”

지난 22일 오전 7시 전남 광양시 망덕포구. 어민 박명자(64)씨의 구수한 사투리엔 근심이 가득했다. 전어잡이 배들이 하나둘 뭍으로 돌아왔지만, 만선은 꿈은 실망이 됐다. 한 어선이 3시간 동안 잡은 전어를 세어 보니 20마리 정도였다.

마을에선 가을 전어 축제를 앞두고 있었다. 전어를 공수해야 하는 수산업자들도 한숨을 지었다. “전어를 잡아주는 배가 7~8척 되는디도 전어가 한 마리도 없어가꼬 횟집이 문을 못 여는 날이 꽉 찼어. 어선들도 배를 묶어 놓고 안 나가려고 하니께 ‘고기 좀 잡아 달라’고 사정하제.” 수산 중매업체를 운영하는 김명자(69)씨는 답답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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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전남 광양시 망덕포구에서 가을 전어 잡이에 나선 어민들. 천권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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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과 바다가 만나는 망덕포구는 남해안의 대표적인 전어 어장 중 하나다. 하지만, 수온 상승과 가뭄 등의 영향으로 가을 전어를 잡기가 점점 어렵다고 어민들은 말한다. 어민 정승환 씨(61)는 “온난화 영향으로 예전에 없던 고기가 잡히고, 전어는 어획량이 자꾸 줄고 있다”며 “가을 전어 축제도 지금보다 전어가 더 잘 잡히는 때로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고 했다.



10월부터 가을…추석은 이제 여름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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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제철이 바뀌는 건 가을 전어 뿐만이 아니다. 과거와 달라진 기후는 가을의 기준 자체를 바꾸고 있다. 초가을에 해당하는 9월은 이미 가을보다는 여름에 가까운 계절로 변했다. 기후 변화가 단순한 이상 기후를 넘어 새로운 기준인 ‘기후 뉴노멀’을 만들고 있다.

기후 뉴노멀은 데이터로도 나타나고 있다. 중앙일보가 기상청에 의뢰해 서울과 목포, 부산, 제주 등 7개 주요 도시의 계절 길이와 가을 시작일을 분석했더니 큰 변화가 있었다. 가을 시작일은 일평균 기온이 20도 미만으로 떨어진 후 다시 올라가지 않은 첫날을 말한다.

최근 10년(2011~2020년)을 기준으로 7개 도시 중에서 남쪽에 있는 3곳은 10월부터 가을이 시작됐다. 목포가 10월 1일, 부산이 10월 7일이었고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제주는 10월 10일에 가을이 찾아왔다. 서울의 경우 9월 29일부터 가을이 시작됐는데, 100년 전(1911~1920년)보다 17일이나 늦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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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가을을 대표하는 명절인 추석은 기후적으로는 여름 명절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최근 30년간 추석 당일의 서울 평균 기온을 분석했더니 1990년대까지만 해도 19.5도로 기후적으로 가을(평균 20도 이하)에 해당했지만, 2000년대와 2010년대에는 각각 20.3도와 21.1도로 여름에 더 가까웠다.

변영화 국립기상과학원 기후변화예측연구팀장은 “초가을인 9월에 낮 기온이 많이 떨어지지 않다 보니 추석에도 음식이 더 빨리 상하면서 식중독 위험이 높아지고, 과일 수확 시기가 달라지면서 명절 물가 상승을 일으키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기후변화는 농업과 수산업뿐 아니라 레저나 패션 같은 실생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金)전어’ 된 가을전어…여름에 더 잘 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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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양시 망덕포구에서 잡힌 전어로 만든 전어 구이. 천권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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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대표하는 생선 중 하나인 전어도 이제는 정작 가을에 찾기 힘들어 ‘금(金)전어’가 됐다. 수온 상승으로 남해안의 전어 어장이 전보다 일찍 형성됐고 주 서식지도 남해안에서 서해안·동해안을 따라 점차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다. 급격한 기후 변화로 인해 수온에 민감한 전어의 어장 환경도 바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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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통계청에 따르면, 1990년에만 해도 남해안(전남+경남) 지역의 전어 어획량은 가을이 여름보다 많았지만, 지난해에는 금어기가 풀리는 7월 중순부터 8월까지의 어획량이 가을철 어획량과 비슷한 수준을 보였다. 올 가을에는 태풍 힌남노 등의 영향으로 조업일 수가 줄면서 전어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전어는 수조에서 오래 살 수 없기 때문에 어획량이 줄어들 때마다 자연산 전어의 시세도 급등할 수밖에 없다.

김맹철 광양시 어민회장은 “30년 전에는 11월 말까지도 전어를 많이 잡았지만, 지금은 수온이 옛날 같지 않아서 여름에 잘 잡히다가 9월부터 전어가 갈수록 줄고 10월만 돼도 (전어잡이가) 끝나버린다”며 “가을에 전어를 찾는 사람은 많은데 고기는 없으니까 여름에 ㎏당 8000원 하던 게 지금은 2만 5000원에서 3만 원까지 올랐다”고 말했다. 이렇게 가을철 어획량이 감소하는 건 가뭄으로 인해 민물 유입이 줄어들고, 기름값 인상으로 조업을 포기하는 어민들이 늘어나는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미역도 녹아…해녀들 “할망 바다가 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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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제주 서귀포시 문섬 인근 바닷속에서 촬영한 모자반숲. 사진 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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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월 제주 서귀포시 문선 인근의 같은 곳에서 촬영한 모습. 풍성했던 모자반 숲이 사라지고 황폐해져 있다. 사진 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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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진 여름은 특히 바다에 치명적이다. 바다는 육지보다 열이 더 천천히 식기 때문에 수온에 민감한 해양 생물들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 특히 올해는 7월 6일부터 이달 7일까지 64일 동안 역대 최장 기간의 ‘고수온 특보’가 발령될 정도로 해수면 온도가 높았다.

해수면 온도가 빠르게 상승하면서 아열대 바다로 변한 제주 앞바다는 미역과 감태 등 해조류 생태계가 초토화됐다. 해조류를 먹이원으로 하는 소라·전복 등의 패류가 점점 자취를 감췄다. 해녀들은 “할망 바다(수심이 얕고 물질하기 좋은 바다)가 다 죽었다”고 한탄했다. 가파도에서 30년 넘게 물질을 해 온 해녀 김영남씨는 “30~40년 전에 물질을 처음 했을 때는 가을에 성게를 채취해서 성냥갑에 담아 일본에도 수출했는데, 지금은 10월이 되면 성게들이 껍데기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윤상훈 녹색연합 전문위원은 “가파도의 8월 평균 수온은 2018년도까지만 해도 25도 밑이었는데 지난해 27.8도로 3년 만에 3도가 올랐다”며 “미역이나 감태 같은 해조류는 가을에 포자를 퍼트리고 번식해야 하는데 티핑포인트(임계점)인 25도 이상의 수온에 노출되면 녹아서 죽기 때문에 번식하지 못하고 결국 바다 숲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계 1위 김 양식 직격탄…“기후위기 대응책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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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완도군 노화도 주변 해조류 양식장을 촬영한 인공위성 사진. 미 항공우주국(N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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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가 김과 미역 등 양식업에 주는 피해도 점점 커지는 추세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는 농작물과 달리 해조류는 가을에 채묘를 시작해 이듬해 봄에 수확을 한다. 채묘는 양식을 위해 씨(종자)를 망에 붙이는 작업을 말한다. 하지만, 해조류 종별로 채묘할 수 있는 안정적인 수온 범위에 도달하는 시기가 점차 늦어지면서 싹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아졌다.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인 김 양식도 과거에는 추석을 전후로 채묘를 시작했지만, 올해는 여전히 수온이 높아 제대로 작업을 시작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국립수산과학원이 22일 발간한 ‘2022 수산분야 기후변화 영향 및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김은 적정 채묘 수온이 22도 이하가 되는 시기가 9월 초에서 9월 말 이후로, 미역은 9월 중순에서 10월 초순 이후로 늦어졌다.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양식업에 가장 큰 피해를 준 자연재해는 ‘고수온(53%)’이었으며 피해액은 1241억원에 달했다. 지난해에도 고수온으로 인해 김과 미역 양식 초기에 어린싹이 녹아 없어지면서 50억 5000만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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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9월기후정의행동'이 주최한 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서울 세종대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번 행사는 2019년 이후 3년 만에 진행되는 대규모 기후변화 관련 행사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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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는 “2100년 한반도 바다 온도는 4도 높아지면서 양식 김의 생산 가능 기간이 축소되고, 채묘 시기도 현재보다 지연돼 생산성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정석근 제주대 해양생명과학과 교수는 “해수면 온도의 상승으로 인한 한반도 어장의 변화가 당초 예상보다 5배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며 “기후위기로 인한 어업 환경의 변화를 예측하고 이에 적응하기 위한 과학적인 수산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천권필·편광현·장윤서 기자,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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