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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일사일언] 양복을 입는 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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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허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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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 열차가 도착하고 플랫폼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버지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오늘도 어김없이 양복을 입고 한 손엔 검은색 서류 가방을 든 희수(喜壽)를 훌쩍 넘긴 아버지가 천천히 걸어오신다.

아버지는 석 달에 한 번 추적 검사를 위해 고속 열차를 타고 서울의 큰 병원에 오신다. 그런데 담당의를 만나는 날은 물론이고 한 주 전 CT 검사를 위해 오는 날에도 항상 양복 차림이다. 제법 긴 시간 기차를 타고, 각종 검사를 위해 환복까지 해야 하는데 옷 좀 편하게 입으시라 하면 “그래도 단정히 입어야지”하며 멋쩍게 웃으신다.

2년 전 위암을 발견했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장기에 전이돼 수술을 하지 못했고 아버지는 방사선 치료 후 식이요법과 운동 등으로 하루하루를 이겨내고 계신다.

남들이 아버지 건강 상태를 물을 때마다 “특별한 치료 없이 더 나빠지지 않고 있어요”라고 덤덤히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병원에 갈 때도 양복을 가지런히 챙겨 입을 정도로 몸가짐이 반듯한 아버지가 얼마나 철저하게 식이요법을 하고 운동을 하며 모범적으로 생활하시는지 나는 안다.

얼마 전 안성기 배우의 혈액암 투병 사실이 알려졌고 많은 팬이 그의 건강을 염려하며 회복을 응원했다. 가발을 쓰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안성기는 다소 어색했지만 재킷 속에 받쳐 입은 하늘색 셔츠는 여전히 단정하면서도 기품 있는 그의 모습을 돋보이게 했다.

진료실 앞 전광판에 아버지 이름이 뜬다.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공로로 표창장이라도 받는 듯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아버지가 일어선다. 머지않아 어느 영화제에서 어떤 수상자로 호명될 때 안성기 배우도 턱시도 차림으로 무대 위에 당당히 오를 것이다. 양복 입은 아버지와 턱시도 입은 국민 배우의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세상의 응원과 함께 그들의 ‘인생 후속작’이 크랭크 인 되었다. 레디, 액션!

[이미란 롯데문화재단 홍보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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