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0 (토)

점검일정 잡자 하니 “사랑해, 만나자”···신당역은 남일 아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민주노총 ‘젠더폭력근절 대책 마련’ 촉구

“신당역 사건, ‘일터의 젠더폭력’ 산업재해”

경향신문

한 여성 가전제품 점검 매니저가 고객으로부터 받은 메시지. 전국금속노조 LG케어솔루션지회 제공


“가전제품 점검을 갔더니 남성 고객이 등 뒤로 와서 스킨십을 했다.”

“남성 역장 2명이 기차 역사에서 음란물을 봤다. 여성 역무원들 뒷자리였다.”


가전제품 판매·점검원부터 공무원, 역무원, 기자까지…. 여성 노동자들은 직종과 관계없이 일터에서 젠더폭력에 시달린다. 스토킹에 시달리던 역무원이 순찰 중 스토커에게 살해당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이후 여성 노동자들의 불안은 더 커졌다.

여성 노동자들이 안전하지 못한 업무환경과 성차별적 조직문화를 고발하고 나섰다. 민주노총은 26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젠더폭력근절 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고 사유하려는 스토킹과 불법 촬영이 만연한 가부장적 여성혐오문화에서 비롯됐고, 일터에서의 젠더폭력에 따른 산업재해”라며 “일하는 여성들이 겪는 일자리에서의 젠더폭력을 직면하고 이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라”고 했다.

고객의 집에 직접 방문해야 하는 가전제품 유지·관리 매니저들은 밀폐된 곳에서 젠더폭력에 시달린다. 김정원 금속노조 LG케어솔루션지회장은 “속옷 차림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거나 스킨십을 하고, 성적인 농담을 나누는 고객도 있다. 직접 방문뿐 아니라 방문일정을 잡기 위해 연락하면 개인적으로 만나서 술 한잔 하자거나 사귀자는 문자를 수십 차례 보내는 예도 있다”며 “매뉴얼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나와서 보고하라고 하지만 쉽지 않다. 고객만족도 평가가 걱정되기도 하고, 교체해서 들어갈 매니저도 결국 다른 여성 매니저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향신문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원들이 26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젠더폭력 없는 안전한 일터를 위한 여성노동자 실태 보고 및 종합대책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코레일의 역무업무 자회사인 코레일네트웍스에서 일하는 여성 역무원 A씨는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남 일 같지 않다. 역무 업무를 평소에 2명이 보기 때문에 1명이 휴가를 내면 혼자 근무해야 한다. A씨는 “혼자 근무하던 여성 역무원이 고객에게 멱살을 잡힌 적도 있고, 누군가는 뺨을 맞고 도망가다가 다른 사람들을 마주쳐 구조되기도 했다”며 “이번 신당역 사건도 그런 구조 때문에 혼자 순회한다는 점을 살인자가 잘 알았기에 계획하고 저지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공무원조차 젠더 격차에 기반한 폭력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 박현숙 공무원노조 부위원장은 “한 남성 민원인이 자신의 민원을 먼저 처리해주지 않는다며 올해 1월 신규임용된 20대 중반 여성 공무원에게 낫을 들고 살해협박을 한 일이 있었다”며 “현장에서는 끊임없이 악성민원과 살해협박이 있는데, 민원담당은 대부분 연차가 낮은 여성 공무원이 한다”고 했다.

실명과 얼굴이 노출된 채 일하는 여성 기자를 향한 공격도 심각하다. 김수진 언론노조 성평등위원장은 “자체 연구조사 결과 여성 기자 대부분이 괴롭힘을 공기처럼 일상적으로 당했다”며 “악성 댓글부터 성희롱성 댓글, 외모 품평, 욕설부터 신상공개와 박제까지 매우 다양하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지하철에서 시민이 ‘너 XX일보 기자 맞지’라며 인신공격을 퍼부은 사례도 있었다”며 “남성 기자는 겪지 않는 외모비하나 강간협박까지 여성기자만을 향한 괴롭힘이 있다. 온라인 괴롭힘을 오프라인 괴롭힘과 같은 폭력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경향신문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원들이 26일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젠더폭력 없는 안전한 일터를 위한 여성노동자 실태 보고 및 종합대책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고 했다. 젠더폭력을 가볍게 보거나 성차별 문화가 만연해 있는 조직문화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조리돌림을 당하는 기자에게 네가 열심히 해서 그렇다는 등 ‘괴롭힘은 개인적인 것이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내부 인식이 있고, 소송하려 해도 마치 거대 언론사가 시민을 공격하는 것처럼 비칠까 우려되기도 한다”고 했다. A씨는 “역무실에서 음란물을 본 역장들은 견책 처분만 받았고, 여성 직원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 발언을 한 셔틀버스 운행팀장은 잠시 강등됐다가 다시 팀장으로 복귀했다”고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정부와 기업의 인식 전환과 책임 있는 대책을 요구했다. 박희은 민주노총 여성위원장은 “정부와 기업주, 노조는 일터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성폭력과 젠더폭력에 대해 이전과 다른 경각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이라며 “여성가족부는 더 이상 여성들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무책임한 발언을 중단하고 지금 당장 공공기관 젠더폭력 피해 실태를 점검하라. 서울교통공사와 고용노동부는 신당역 사건을 산재사망으로 인정하고 성폭력이 중대재해임을 공표하라.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는 윤석열 정부와 집권당도 여성의 현실을 직시하라”고 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추모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 ‘눈에 띄는 경제’와 함께 경제 상식을 레벨 업 해보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