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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대전 왕년의 ‘시네마 천국’ 70년 추억 담긴 은막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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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동구 인동의 ‘동화극장’ 전경. 70년 가까이 이곳에서 자리를 지키다 26일 문을 닫았다. 최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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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천을 따라 주욱 올라가다 만나는 곳. 한때는 전국에서 유명했던 인동쌀시장 옆을 70년 가까이 지키고 있는 대전 인동의 ‘동화극장’은 대전에 마지막 남은 옛 극장이다. 지금은 1층에 올갱이국·추어탕을 파는 식당과 주방환기시설을 제작하는 공업사 등이 있지만, 2층짜리 건물 전체를 극장으로 쓰며 명성을 날리던 시절도 있었다.

동화극장은 1950년대 초 고 오영근 동양백화점 회장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대전의 1세대 지역 재벌인 오 회장은 젊은 시절 포목상을 해 번 돈으로 대전중앙시장에서 가까운 인동에 동화극장을 세우고 직접 운영했다. 극장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오 회장은 이 극장으로 큰돈을 벌어 1963년 대전역과 옛 충남도청 사이에 시민관(영화관)을 열었고 1980년에는 시민관을 부수고 동양백화점을 세웠다. 오 회장에겐 동화극장이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밑거름이었다.

지난 22일 찾은 동화극장 앞은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베이지색 바탕의 건물 2층에 까만 글씨로 동화극장이라 쓰여 있었다. 간판 위에는 ‘성인 영화만을 선정 상영하는’이라 적혀 있고, 극장 입구에는 성인영화 포스터들이 붙어 있다. 그 앞에 서 있는 노신사에게 극장에 대해 물으니 “내가 여기 사장”이라는 말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낡고 구부러진 계단 끝에 고장 난 시계들과 녹슨 난로가 놓인 사무실이 있었다. 37년 동안 동화극장을 운영한 심종순(87)씨는 해진 의자에 앉으며 “건물 전체를 극장으로 쓰던 시절엔 이곳이 영사실이었다. 찾는 사람이 점점 줄어 지금은 2층에서만 80석 규모로 극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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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극장 사무실 모습. 예전에는 영사실로 쓰였다고 한다. 최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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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영화 상영 중이었다. “한명 오면 안 틀어. 2명 이상은 돼야 틀지. 6000원 내면 3편 볼 수 있다곤 하는데, 사람 앉아 있으면 계속 돌아가.” 지금은 성인영화만 트는 곳이지만, 예전엔 개봉관들을 다 돌고 온 영화를 거의 마지막에 상영하는 끄트머리 극장(재개봉관)이었다. <사춘기여 안녕>(1963년 2월18일) 같은 옛 청춘영화를 상영하기도 했고 ‘전국육체미대회’(1964년 3월25일) 같은 행사도 열었다고 한다. 1960∼80년대에는 대전·중앙·신도·동양·고려극장, 시민관 등 지역의 17개 극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지역에서 영화 관련 일을 하던 심 사장이 극장 운영권을 넘겨받은 건 1985년이다. 1993년 큰불이 난 뒤 원래 자리에 지금의 건물을 다시 세웠다. 한때는 신도·고려극장과 함께 ‘극장 트로이카’로 불렸지만, 대형 영화관들이 들어서고 원도심까지 침체하면서 최근에는 성인영화관으로 명맥만 유지해왔다.

“예전에는 하루에 300명 이상은 극장을 찾았지. 학생들이 ‘19금’ 영화를 보겠다고 화장실 창문으로 들어오면 그걸 찾아내서 내쫓는 일도 자주 있었고. 그때가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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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영업을 앞두고 심종순 동화극장 사장이 22일 <한겨레>와 만나 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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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동화극장도 26일을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건물이 팔리며 극장도 문을 닫는다. 극장 건물은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선다고 한다. 매일 아침 7시면 극장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손님들에게 공짜 자판기 커피를 내밀던 심씨 일상도 이제 마지막이다. 매일 점심을 먹던 극장 옆 백반집에서 막걸리를 한병 놓고 앉더니 그가 말했다.

“내가 멍텅구리라 여기까지 왔지. 기분? 서운하지. 그래도 어쩌겠어. 나도 나이를 먹었고 세상도 바뀌었는걸. 술이나 한잔 더 받으시게.”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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