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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5대 악재 한꺼번에 밀려오자…최대실적 낸 정유사도 투자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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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계 비상경영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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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기업들이 투자 재검토·보류 카드를 꺼내드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원화값 하락과 임금 인상 압력 등으로 비용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어서다. 여기에 더해 경기 위축, 보호무역주의 확대 등 글로벌 경영 환경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불확실성이 커졌다. 이로 인해 일부 기업들부터 '투자 백지화'라는 강수까지 두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오일뱅크의 이번 투자 중단 결정은 이 같은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정유 업계에선 이번 조치를 상당히 이례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국내 정유 4사가 조 단위 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투자 계획을 일부 조정한 경우는 있었지만 시설투자 계획을 전면 백지화한 것은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정유사들이 지난 상반기 역대급 실적을 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 상황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투자에 소요되는 비용 상승 등으로 이번 투자건의 수익성이 악화됐고 향후 원자재 시장 전망에 대한 합리적 예측도 어려워 불가피하게 투자 중단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LG에너지솔루션이 미국 투자를 보류하고 있는 것도 배경은 엇비슷하다. 당초 회사 측은 1조7000억원을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원통형 배터리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까지 했다. K배터리사들이 미국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면서 투자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으로 전망됐지만 원화값 급락과 미국 내 인건비 급증이 문제로 대두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월말 기준 원화값은 작년 12월부터 지난 8월까지 13.7%나 급락했다. 이달 들어선 1500원 선까지 갈 수 있다는 비관론마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 투자 비용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LG에너지솔루션의 침묵도 길어지고 있다.

한화솔루션 역시 지난 7일 원자재 가격 급등을 이유로 1600억원 규모의 질산유도품 DNT 시설 신규 투자 계획을 철회했다. DNT는 가구 내장재와 자동차 시트 등 폴리우레탄 제조에 쓰이는 톨루엔디이소시아네이트(TDI)의 원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코로나19 장기화 등으로 원자재 수급 상황이 악화된 가운데 대내외 경영 불확실성이 신규 사업의 발목을 잡은 것으로 분석된다.

신세계푸드는 최근 미국 내 대체육 자회사인 베터푸드의 자본금을 절반 규모로 줄이면서 글로벌 경기 침체 대응에 나섰다. 신세계푸드는 지난 7월 베터푸드에 600만달러의 자본금을 출자하겠다고 밝혔지만 두 달여 만에 자본금을 300만달러로 줄이고, 내년 상반기 400만달러 규모의 증가 계획까지 접었다.

일부 수출기업들은 거시경제 변수에 업황 악화까지 겹치면서 보수적인 투자 행보로 돌아섰다.

디스플레이 업계 역시 거시경제 불확실성 확대로 인해 TV용 대형 디스플레이 투자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퀀텀닷(QD)-유기발광다이오드(OLED)에서 수율(전체 생산품에서 양품이 차지하는 비율) 85%를 달성했으나 생산라인 증설 투자에 신중한 모습이다.

그 대신 삼성디스플레이는 중소형 OLED 생산에 집중하고 있다. TV용 대형 OLED 생산에 주력하던 LG디스플레이도 신규 투자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악재들이 단시간에 개선될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다. 원화값의 경우 한국과 미국 간 금리 역전이 일어난 상황에서 자금 유출이 불가피하다. 시장에서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면서 원화 가치는 하락 기조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물가 역시 정점론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은이 27일 발표한 '9월 소비자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대인플레이션율은 8월(4.3%)보다 0.1%포인트 낮은 4.2%로 집계돼 8월과 9월 두 달 연속 하락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반기 임금 인상 압력과 일부 원자재 가격의 상승은 불확실성의 그늘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연이은 자이언트스텝으로 인해 글로벌 경기가 위축되고 중국 역시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기업의 실적에도 당분간 빨간불이 켜질 전망이다. 급등하는 금리 역시 투자 비용 조달에 어려움을 주는 요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위기도 복병으로 남아 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불경기와 물가·환율 상승 등 악재가 한꺼번에 닥쳐오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며 "실적과 투자 계획 모두 위축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고금리·고환율·고물가 등 이른바 '복합위기'로 경영 환경이 빠르게 악화되면서 삼성, LG 등 국내 주요 그룹들이 사장단 회의를 줄줄이 열어 대응책 마련에 나선다.

27일 재계에 따르면 LG그룹은 이번주 중에 구광모 회장 주재로 사장단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구 회장은 점차 고조되는 위기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사장단과 머리를 맞댈 것으로 관측된다. 국내외에서 공격적인 투자 행보를 보여왔던 SK그룹도 다음달 계열사 전체 최고경영자(CEO)가 참여하는 경영 세미나를 열고 사업 계획을 전면적으로 점검할 것으로 전해졌다.

[박윤구 기자 / 오찬종 기자 / 정유정 기자 / 우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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