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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신동욱 앵커의 시선] 이런 가을을 맞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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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

영원한 가객 김광석은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바람에 몸을 맡기며 햇살 눈부신 곳으로 간다고 노래했습니다. 가을을 맞으러 가는 길엔 완행열차가 제격이지요.

시인도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라고 했습니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했지"

가을 햇살은 경춘선 철로변 호수에 은빛 물비늘, 윤슬로 빛납니다. 고즈넉한 산사 마당, 야트막한 시골길 돌담을 어루만집니다. 세상을 수채화처럼 투명하게 칠합니다.

그렇듯 가을은 하늘에서 옵니다.

"하늘이 내게로 온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며칠째 높푸른 가을 하늘이 펼쳐지면서 여름내 쌓인 갈증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그 하늘이 서울 한복판 한강에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가을은 여름이 타고 남은 것" 이라고 했던가요. 엊그제 일요일 반포한강공원에는 폭염과 장마, 폭우와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가 남아 있었습니다.

예전 이맘때면 메밀꽃이 하얗게 흐드러지던 서래섬은 범람한 흙탕물에 황토밭이 돼버렸습니다.

강변 억새와 잔디도 쑥대밭이 됐고, 샛강도 쓸려온 토사가 덮쳤습니다. 그래도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파란 하늘 아래 자리를 펴고 쉽니다.

선선한 가을 바람 맞으며 산책합니다. 작은 요트들이 돛을 펴고서 한가로이 떠다닙니다.

가을은 위안이자 축복입니다. '삼백예순날 서울 하늘이 오늘만 같아라'는 축원이, 콧노래처럼 절로 새 나옵니다.

시인은 가을볕에 마음을 내려놓고 비우고 씻어내며 너그러워집니다.

"두 손을 펴든 채 가을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번 가을 세상사는 한증막에라도 온 듯 숨이 턱턱 막힙니다. 뒤죽박죽 세상의 열기는, 가을이 오도록 식을 줄을 모릅니다.

오랜 시간 우리를 어둠 속에 가뒀던 코로나가 물러가자 이번에는 경제 위기가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이 모든 위기가 먼 세상의 일인 양 가슴을 후벼파는 독설과 증오를 들쑤시는 삿대질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시인의 깨달음처럼 그 모든 아우성이 잦아들고, 가을처럼 서늘하고 차분한 이성의 시간이 찾아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서는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9월 27일 앵커의 시선은 '이런 가을을 맞게 하소서' 였습니다.

신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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