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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판다와 미사일…중일 수교 50년, “안정적 관계는 힘들다”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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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 29일, 저우언라이-다나카 국교 정상화

수교 이후 양국, 갈등 속에서도 끊을 수 없는 관계 구축

영유권분쟁·대만문제 등 최근 긴장감 고조

세계일보

일본 우에노 공원의 판다. 1972년 수교 당시 중국이 일본에 선물한 판다는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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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28일, 일본 도쿄 우에노공원 인근에 수 백명의 인파가 몰렸다. 이날 중국에서 온 ‘두 마리의 국빈’을 보려는 사람이었다. ‘캉캉’과 ‘란란’이란 이름의 판다. 한달 전인 9월 29일 중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중국이 일본에 선물한 판다였다.

중·일우호의 상징이 된 판다는 여전히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동물로 종종 뉴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지만 최근 양국의 관계는 어느때보다 긴장감이 높다.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와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공동 서명으로 수교을 맺은지 50주년이 되는 29일, 일본 언론은 “양국 정부가 목표로 하는 건설적이고 안정적인 관계 구축은 전망하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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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주석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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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 열리지 않는 정상회담…“건설적 관계 구축 어려워”

요미우리신문은 “(양국의) 긴장관계는 정상 간의 대화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시진핑 중국 주석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수교 50년을 기념해 이날 서로 축전을 보내긴 했으나 직접적인 교류는 거의 없다. 기시다 총리가 취임한 지난해 10월 두 사람은 전화로 대화를 나눴으나 대면한 적은 아직 없다. 그는 이날 도쿄에서 열린 수교 50주년 기념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양국의 대면정상회담은 3년 가까이 성사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표면적으로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관계 발전 기대를 표시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 국장 참석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완강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28일 만난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기시다 총리와 시 주석은 건설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완 부주석은 “(중국 정부가 조문단을 파견한 것은) 중국이 중·일관계와 기시다 정부를 중요시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기시다 총리가 코로나19에 감염되었을 때 시 주석은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양국 관계의 구축을 함께 추진해 나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질 못하다. 일본 언론은 이런 상황을 중국의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NHK는 “중국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며 패권주의적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요미우리신문은 “국력의 증대를 배경으로 군비확산을 계속하고 있는 중국은 주변 국가에 위압을 반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양국의 긴장을 높이는 구체적인 요인으로는 영유권 분쟁 중인 센카쿠제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대만문제를 꼽았다. 센카쿠제도 주변 해역에서 반복되고 있는 중국 선박의 침입, 지난달 대만을 겨냥한 군사훈련 중 발사된 중국 미사일이 일본 배타적경제수역(EEZ)에 떨어진 점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아사히신문은 “1972년 일·중공동성명을 시작으로 (중국 집권세력의) 1세대인 마오쩌둥 이후 세대마다 양국 관계의 기반이 되는 문서를 만들어왔다”며 “그러나 5세대에 해당하는 시 주석과의 사이에는 아직 그런 문서가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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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카쿠제도 해역에서 나란히 항해하고 있는 중국, 일본 경비정.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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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성장과 경계심 높인 일본…부침의 반세기

1972년 이후 50년간 수많은 부침을 거듭했지만 일본에게 중국은 최대 교역상대로서 간단히 끊어낼 수 없는 국가가 되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수교 체결 당시 중국은 일본에 2차 대전과 관련한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일본이 1979년 이후 정부개발원조(ODA)를 제공했고, 이것은 중국의 인프라 정비 등 경제발전을 이끄는 요인이 됐다. 신문은 “지난해 종료될 때까지 (일본이 중국에 제공한) ODA 총액은 3조6000억엔(약 36조원)에 달했다”고 전했다.

관계 진전이 이뤄지면서 일본은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중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주요 7개국(G7)의 움직임에 반대할 정도로 우호적인 자세를 이어갔다. 1992년 아키히토 일왕 부부의 방중은 우호 분위기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중국이 경제, 군사 부문의 자신감을 높이면서 일본 내에서 중국 위협론이 확산되는 등 양국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1년 8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중국 내 반일 여론이 확산됐다. 2010년 9월에는 센카쿠제도 해역에 진입한 중국 선박의 선원들을 일본 해상보안청이 체포하면서 중국이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막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2016년 아베 당시 총리가 중국 견제를 염두에 둔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을 제창하며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한 것은 지금도 양국 갈등의 요인으로 평가된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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