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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질주하는 폐배터리…금리 올라도 '닥공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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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배터리 산업을 둘러싼 글로벌 기업 간 주도권 다툼이 가열되고 있다. 통상 금리 인상 구간에서 기업들은 설비 투자(CAPEX)를 줄이기 마련이지만 폐배터리 산업은 예외다. 관련 기업의 설비 투자와 지분 투자 등의 소식이 하루가 멀다고 잇따른다.

매경이코노미

현대차그룹이 폐배터리 사업을 구체화하기 위해 전사적으로 나선다. 사진은 기아와 앙코르가 공동 개발한 ESS 프로토타입. (앙코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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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배터리 재활용·재사용 각광

▷연평균 34% 성장률 기대

폐배터리를 규정하는 명확한 규범은 아직 없다. 업계에서는 대체로 전기차 배터리 성능이 초기 대비 70~80% 이하로 떨어지면 폐배터리로 분류한다. 배터리 성능이 저하하면 주행 가능 거리가 짧아지고 충전 시간이 늘어난다. 관련 업계에서는 전기차 배터리의 수명을 10년 안팎으로 보지만 실제 수명은 이보다 낮을 것으로 관측된다. 전기차 운전자마다 운전 습관이 천차만별이고 제반 주행 여건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폐배터리 산업 사이클은 전기차와 대략 7~8년 정도 시차를 두고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폐배터리 산업 영역은 크게 재활용(Recycle)과 재사용(Reuse)으로 구분된다. 재활용은 폐배터리에서 고가 원자재를 추출해 활용하는 방식이다. 폐배터리를 방전시킨 후 음극, 양극, 분리막 등으로 분해해 리튬, 니켈, 코발트, 망간, 구리 등을 회수한다. 재사용은 폐배터리 상태를 점검한 뒤 ESS(에너지 저장 장치)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배터리 잔존 성능이 70~80% 이상이면 ESS 등에 재사용되고 50% 이하면 필수 광물을 재활용하는 식이다.

구체적으로 폐배터리 산업의 원천이 되는 재료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LG에너지솔루션 같은 배터리 셀 제조사에서 발생하는 각종 스크랩(불량품이나 찌꺼기 등)과 불량 셀이다. 두 번째는 운전자가 전기차 사용 후 차량 교체 혹은 폐차 때 발생하는 폐배터리다. 관련 공정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스크랩 등 원료에서 파쇄·분쇄 등의 공정을 거쳐 분말 형태 배터리파우더 상태로 1차 가공을 하는 전처리 공정(리사이클링파크), 배터리파우더로부터 코발트, 니켈, 리튬, 망간 등을 용매 추출 등의 공정을 거쳐 최종 황산화 제품으로 2차 가공을 하는 습식제련 공정(하이드로센터) 등이다.

현재 글로벌 폐배터리 관련 업체는 배터리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불량품이나 불량 셀 등을 재활용하는 사업으로 돈을 벌고 있다. 전기차 시장이 빠른 속도로 커지면서 이런 불량품을 재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먹거리가 된다.

물론 앞으로 시장 규모가 커질 것으로 예측되는 분야는 불량 셀이나 스크랩이 아닌 폐배터리다. 현재는 극초기 단계지만 폐배터리 산업은 전기차 시장의 성장과 궤를 같이하므로 전망이 밝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용량 기준, 폐배터리 시장은 2025년 42GWh에서 2030년 345GWh, 2040년 3455GWh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연평균 성장률은 34%에 달한다.

전기차 시장이 아직 초기 단계고 2010년 중후반부터 성장이 본격화됐다는 점에 비춰, 폐배터리 산업은 2030년 이후 가파른 성장 속도를 보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대부분 시장조사기관은 2030년 이후 약 10년 주기로 많게는 10배씩 성장할 것으로 추정한다.

최근 폐배터리 산업이 각광받는 것은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따른 원자재 가격 폭등 때문이다. 전기차 수요는 해마다 급증하지만 채굴할 수 있는 배터리 핵심 광물은 한정돼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전기차 초과 수요로 원자재 가격이 오르던 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돌발 변수가 가격 상승을 부채질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다소 먼 미래의 일로 인식됐던 폐배터리 산업에 글로벌 기업이 앞다퉈 뛰어든 배경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핵심 광물을 일정 수준 재활용하도록 의무화하거나 권장하는 내용의 법안을 내놔 주목받는다. 가장 적극적인 곳은 유럽이다. 유럽연합(EU)의 입법 기구인 유럽의회는 지난 4월 ‘지속 가능한 배터리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배터리의 원자재 채취부터 제품 생산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재활용 원료 사용을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법안이 발효되면 2030년부터 산업·전기차용 주요 배터리 원료를 일정 비율 이상 재활용 소재로 써야 한다. 미국은 대규모의 금전적 지원을 약속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최근 배터리 재사용과 재활용에 6000만달러(약 760억원)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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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내재화보단 전략적 협업

▷완성차 vs 배터리 업계, 기 싸움

주요 기업의 투자 행보는 아직까지 ‘정중동’ 행보다. 설비 투자를 통해 관련 시장에 직접 진출하는 내재화 전략보다는 외부 업체와 제휴나 지분 투자 등으로 전략적 대안을 확보해두는 단계로 파악된다. 엄밀히 말해, 폐배터리 산업은 아직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극초기 시장이다. 유동성 등 보유 자원이 풍부한 다국적 기업이 공격적으로 설비 투자에 나서 내재화 전략을 펼 만큼 유의미한 수준의 수요가 창출되지 않고 있다. 현재 주행 중인 전기차는 대부분 수명이 최소 수년 이상 남았고 배터리 업체의 셀 제조 수율도 점차 향상 중이다. 진짜 돈이 되는 대규모 폐배터리 시장 형성은 빨라야 2030년 중반은 돼야 가능할 것이라는 신중론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이런 배경 아래, LG화학과 LG에너지솔루션은 북미 폐배터리 재활용 업체인 ‘리-사이클(Li-Cycle)’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글로벌 배터리 생산 공장별로 폐배터리를 배터리 원재료로 재사용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중국은 연내, 한국 오창과 폴란드 공장은 내년까지 순환 체계를 구축한다. LG화학은 북미에 폐배터리 재활용과 연계한 양극재 공장 설립을 검토 중이다.

SK그룹도 폐배터리 사업을 챙긴다. SK에코플랜트는 올 초 글로벌 전자전기폐기물(E-Waste) 기업 ‘테스(TES)’를 인수하고 기업공개(IPO)에 나선다. SK이노베이션은 올해부터 폐배터리 재활용 데모 공장을 가동 중이다. 세계 최초로 개발한 수산화리튬 추출 기술은 2025년 상용화 예정이다. 업계에서는 SK온·SK이노베이션·SK에코플랜트가 폐배터리 사업에서 시너지를 추구할 것으로 본다. 삼성SDI는 생산 공정 중 폐기되는 제품을 국내 배터리 리사이클링 업체인 성일하이텍에 공급한다.

전기차 시장에서 배터리 업체와 ‘파워 게임’을 벌이는 완성차 업계도 폐배터리 시장을 눈여겨본다. 전기차는 배터리 없이는 구동이 불가능한 만큼 완성차 업체 협상력은 배터리 업체보다 열위에 놓인 상황이다. 이런 구도를 뒤집으려 최근 현대차그룹은 배터리 셀 설계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요한 배터리 직접 제조는 지금처럼 셀 메이커에 맡기더라도 설계 주도권을 가져와 배터리 업계를 대상으로 한 협상력을 키우겠다는 복안이다. 반도체 시장에서 자체 칩 설계 역량이 뛰어난 애플이 위탁생산 전문 파운드리 업체 대비 협상력이 월등한 구도와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이런 전략적 흐름 아래, 현대차는 현대모비스·현대글로비스와 폐배터리 사업 TF(태스크포스)팀을 구성했다. 기아는 독일의 국영 철도 회사와 폐배터리 공급 계약을 맺었다. 폐배터리 재활용은 전기차 제조원가를 상당 부분 낮출 수 있으며 이는 곧 완성차 업체의 배터리 업계를 향한 협상력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기술·사회 ‘공진화’

▷제도적 기반 확충 속도 내야

폐배터리 산업 활성화를 위해서는 법적, 제도적 기반 확충도 병행돼야 한다. 하이테크 기반 산업은 기술 진보 그 자체의 동력만으로는 성장하는 데 한계가 따른다. 학계에서는 이를 ‘기술·사회 공진화(Co-evolution)’ 이론으로 설명한다. 전에 없던 신기술일수록 주류 산업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사회와 서로 상호작용하며 이를 토대로 진화한다는 내용이다.

한 예로, 당장 올해부터 전기차 사용 후 폐배터리를 민간 업체에서 재활용·재사용할 수 있게 됐지만 안전성은 물론 성능 검사 기준이 사실상 전무하다. 환경부 등 관련 부처에 따르면 2021년 1월 이후 정부 보조금을 받고 구매한 차의 배터리는 올해부터 차주가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다. 2021년 1월 이전 보조금을 받아 출고한 차는 기존대로 전기차 폐차(말소)시 지방자치단체에 배터리를 반납해야 한다. 이는 폐배터리 민간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취지지만 관련 업체 대부분이 영세한 폐차 업체인 데다 재사용과 재활용을 가를 정부 표준 기준도 없는 상황이다. 김세엽 한국자동차연구원 기술정책실장은 “전기차 사용이 끝난 배터리를 활용할 수 있도록 재처리 기술을 개발하고 재사용 배터리 품질·성능 표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주도 혁신 체계 마련에 적극적인 중국은 배터리 이력 관리는 물론 생산자가 재활용까지 책임지는 ‘생산자 책임제’를 시행 중이다. “선진국은 배터리 원재료 채굴, 제련 비용 절감을 위해 일찌감치 배터리 재활용 산업 육성에 나섰다. 중국도 정부 주도로 강력한 재활용 정책을 펼치지만 우리나라 폐배터리 재활용 산업은 여전히 초기 단계다. 폐배터리 기준부터 확실히 정하고, 제대로 된 배터리 회수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폐배터리 산업 육성책이 절실하다.” 김희영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연구위원의 우려 섞인 진단이다.

[배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77호 (2022.09.28~2022.10.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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