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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민족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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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훈 칼럼니스트]
필자가 근무하던 민족미래연구소는 매달 한번씩 논객들을 초빙해서 강연회를 열었다. 한번은 연사로 초빙된 경제전문가가 필자에게 단체 이름에 '민족'이 들어가 있는지 물었다. 21세기에 민족을 이야기하는 건 너무 고루하지 않냐는 질문까지 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가늠할 수 있었다. 지난 2백년간을 뒤흔들었던 개념에는 자본, 이념, 계급, 민족 등이 있다. 민족은 세상을 움직인 핵심 개념이었다. 그럼에도 '민족'은 이제 담론장에서 찾기 힘들어졌다.

사람들은 어쩌다 민족주의에 냉담하게 된 것일까? 소비에트가 붕괴한 후, 미국의 단극적 패권이 추구되었다. 이 패권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추구했다. 미국은 각 나라의 문턱이 사라진 평평한 세상을 원했다. 자본은 생산기지와 시장의 확대를 위해 단일한 규칙에 기반한 세상을 원했다. 각 나라, 각지의 특수성은 사라지고 미국이 대변하는 보편성만이 유일한 규칙인양 인정됐다.

곳곳의 특수성, 지역성은 점점 사라져갔다. 지역의 특수성을 담보해주던 민족주의도 위태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지식인들이 민족주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임지현, 권혁범, 윤해동, 이영훈 등에서 보여지듯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결국 21세기 담론장에서 민족주의는 급기야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탈민족주의 담론이 지식대중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된 데에는 민족주의가 자민족 이기주의라는 직관적 느낌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민족주의는 자민족 이기주의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인상은 역사상 '민족'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나온 판단이다. 민족주의가 집단이기주의라면 민족주의자로 자신을 희생시킨 수많은 사람들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민족주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먼저 탈민족주의 담론은 한결같이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과장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정치철학자 나종석은 논문 '민족주의와 세계시민주의'(<헤겔연구> 26권, 2009)에서 유행하던 탈민족주의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탈민족주의 담론은 민족주의 여러 형태들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기 보다는 민족주의의 특정한 형태, 즉 인종적 민족주의나 억압적이고 공격적인 민족주의를 민족주의의 본래 모습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인다." 민족주의는 원래 공격적 본능에 충실하다는 주장은 여러 곳에서 들린다. 역사학자 박지향은 아예 이렇게 단언한다. "민족주의는 본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이념이다." 사실일까? 정확하게는 민족주의의 특정 측면일뿐이다.

프레시안

▲ 프랑스혁명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1789년 프랑스혁명이 아닌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한 작품이다.(외젠 들라크루아 作, 루브르 박물관 소장, 캔버스에 유채 260x32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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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민족주의는 어떻게 발생했을까?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인민들은 지쳐갔다. 주기적인 불황과 노예노동은 이전 시기에는 없던 현상이었다. 프랑스혁명이 진행된다. 외부 세력의 간섭으로부터 프랑스공화국을 수호하려는 사람들이 '프랑스'를 조국으로 받아들인다. '프랑스' 깃발 아래에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 '프랑스' 민족의 일원으로 인권을 요구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의 힘에 짓눌려 있던 민중들이 일어섰다. 프랑스혁명 시기 봉기한 민중이 이전과 다른 점은 프랑스민족이라는 '호명'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깨어난 시민들은 이후 인권과 권리에 관한 지평을 확대해 간다. 민족주의가 배타성만을 강조하는 사상이라는 주장은 과장에 불과하다.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을 계기로 민족국가는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민족국가의 내부성원들은 '국민'의 발명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했다. 어느 마을 누구네 첫째 아들, 어느 가문 둘째 아들에서 '국민'이 되었다. 하버마스는 현대 세계의 민주공화국의 모체는 이런 민족국가이며 이런 민족국가의 기반은 '국민'에 속하는 귀속감이라고 말한다. 즉 국민적 귀속감이 정체성을 만들고 정체성이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민주공화국은 이후 현대 민주공화정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민족은 민족성원 즉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었다. 영어로는 민족이든 국민이든 nation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근대에서 종족(ethnic)이 아닌 민족이 역사의 주역이 된 것은 국민이라는 호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종교혁명 이후 신본주의적 에토스가 얇아졌다. 자본주의는 지역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소규모공동체를 해체했고 신본주의의 퇴조는 개개인의 정체성을 흔들었다. 인민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두가지 울타리를 모두 잃어버렸다. 민중은 자본주의와 자신의 정체성문제로 괴로워했다. 프랑스혁명 이후 민중들은 공화국 프랑스를 조국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공화국 내부의 다른 구성원에 대해서 동질감, 동포애를 느끼기 시작했다. 국가는 신성하고 우리는 국가의 부름을 받은 존재이며 우린는 같은 공화국의 구성원이다. 이런 믿음이 널리 퍼졌다.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집에 대한 인식'을 강조했다고 나종석은 말한다. 시골 농촌이 상인자본주의가 장악해 들어감에 따라 도시로 밀려난 사람들은 '집'이 없었다. 집은 공간이 아니다. 집은 나의 네트워크망의 총체다. 집을 잃어버렸던 민중들은 도시에서 공화국 안에서의 '우리'를 느꼈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민족국가는 국민을 발명해내어 민주공화국으로 전환하는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즉 인민간의 끈끈한 유대감이 먼저 있고나서 공화국의 법적 장치가 작동한다는 의미다. 만약 유대감이 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좋은 법률을 주면 잘 살수 있을까? 이런 아이디어에 가까운 것이 하버마스의 헌법애국주의이다. 헌법에 충성하려는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받아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자는 다소 공허한 이야기다. 역사는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유대감이 있고 나서야 민족국가는 수립되고 이 민족국가는 이후 민주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나종석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회통합은 정치원칙들의 공유보다 훨씬 깊게 들어가는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사회통합은 어디에서 구해질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의 하나가 바로 공동의 민족정체성이다." 사회통합은 다른 구성원을 타자로 인식하는 한 성취되기 어렵다. 나와 같다는 일체감과 소속감이 있어야만 수많은 사람이 통합될 수 있다. 공동의 역사, 문화, 언어를 갖고 있기에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그래서 타자가 아닌 우리로 의식하게 된다.

지식대중들은 '민족주의'라면 우선 우리만 생각하는 집단이기주의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친족상도례' 개념에서 보듯 우리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고 애착을 느끼는 대상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모두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역사 속에서 묵자의 사해동포주의는 사장되었지만 건강한 가족을 기본 단위로 사회공학을 궁구했던 유가의 가르침은 수천년을 이어져 왔다. 세계시민주의를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고 좋은 것이라고 무턱대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시민주의가 어떤 구체적 장에서 발화되는지 유념해야 한다. 특정 패권세력에 의해 선동되는 그 세계시민주의는 어떤 사상보다도 위험할 수도 있다. 자유주의가 서구 제국주의 절정기에 주로 전파되었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종석은 이렇게 우려한다. "탈민족주의 담론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해 위축되는 민족국가가 사회적 불평등 질서 및 민주주의의 위축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외면한다. 그리하여 이 담론은 세계시민사회의 미래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세계주의가 새로운 형태의 야만으로 귀결될 가능성에 거의 주목하지 않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다르게 민족국가의 토대인 민족주의는 공동체 구성원의 인권과 권리에 대한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반면에 세계시민적 보편주의는 특정 상황에서 패권세력의 전횡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이것이 구체적 역사 속에서 나타난 민족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모습이었다. 탈민족주의는 의도적이었든 아니든 외곽에서 신자유주의를 지원하는 담론으로 기능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신자유주의는 종말을 고했다. 이제 탈민족주의도 종말을 고해야할 시간이다.  

[김창훈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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