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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이장면]킵초게만 기억한 마라톤...함께 뛴 '물병 든 남자'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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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빛이 되고 싶어 합니다. 모두가 1등의 환호에 꽂히고, 승자를 향한 갈채만 기억하니까요. 그러나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환한 빛으로 만들어주는 사람, 혹은 그 빛의 뒤에서 그림자가 되는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우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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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초게의 마라톤 세계신기록, 숨은 영웅은 따로 있습니다. 물병을 건네주는 자원봉사자 슐케의 헌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진=슐케 트위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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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채 물병을 들고 애타게 기다리는 이 사람이 그렇습니다. 마라토너에게 눈에 잘 띄도록 옷은 핑크색입니다. 물병엔 선수 이름도 친절하게 적었습니다. 길가에 서서 물병을 높이 치켜 올리고 있습니다. 물병의 아래쪽을 잡고서 마라토너가 물병 위쪽을 잘 낚아챌 수 있도록 신경도 씁니다. 육상 이어달리기에서 바통을 주고받는 순간처럼 긴장이 느껴집니다. 달려온 선수가 물병을 잡아채자 그제야 주먹을 공중에 내지릅니다. 잠깐의 환호,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다음 물병 전달 구간을 향해 페달을 힘차게 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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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을 들고 킵초게를 기다리는 슐케의 모습이 간절합니다. (사진='플로트랙'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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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클라우스-헤닝 슐케는 마라톤 대회에서 물병을 건네주는 자원봉사자입니다. 아무도 기억 못하는 이름이죠. 그러나 베를린 마라톤의 숨은 영웅입니다. 육상 전문 '러너스월드'에 따르면. 이력은 평범합니다. 56세, 독일의 건설 기술자입니다. 한때 철인3종을 즐기다 1997년부터 베를린 마라톤의 자원봉사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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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병맨' 슐케는 킵초게의 눈에 잘 띄도록 핑크색 옷을 입었습니다.(사진='플로트랙'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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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에게 음료를 건네는 일, 하찮게 보이죠. 그러나 마라톤에선 대수롭지 않은 그 일이 참 중요합니다. 42.195km를 뛰는 마라토너에겐 5km마다 급수대에서 자신이 준비한 스페셜 음료(영양음료), 혹은 대회 측이 제공하는 제너럴 음료(물)를 마실 수 있습니다. 이걸 놓치면 제대로 수분과 영양 보충이 안돼 레이스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베를린 마라톤은 주요 선수에 한해서 급수 구간에서 자원봉사자 1명이 선수 1명에게 음료를 직접 전달하는 서비스를 합니다. 좋은 기록을 내기 위한 특별 대우죠. 슐케도 그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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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케는 킵초게에게 물병을 건넨 뒤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다음 급수대로 향합니다. (사진='플로트랙'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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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케의 파트너는 킵초게, 이젠 누구나 아는 이름입니다. 최근 베를린 마라톤에선 2시간1분09초의 세계신기록을 세웠습니다. 킵초게 덕에 인간의 한계로 여겨진 마라톤 2시간 벽은 이제 69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마라톤 42.195km를 2시간1분09초로 달린다는 건 100m를 평균 17초227로 뛰었다는 의미죠. 대단합니다. 스피드를 꾸준하게 유지하고, 또 끝까지 지치지 않고 달린다는 건 경이롭습니다.

'러너스월드'에 이어 '뉴욕 타임스'는 킵초게의 위대한 성취에 빠질 수 없는 '물병맨' 슐케의 스토리를 보도했습니다. 2018년 베를린 마라톤을 앞두고 킵초게 팀과 사전에 만나 어떻게 하면 물통을 실수없이 건넬 수 있는지, 그들만의 약속을 만든 것도 소개했습니다. 달리는 선수가 물병의 윗부분을 편하게 낚아챌 수 있게 한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2018년엔 11번의 물병을, 올해는 13번의 물병을 제대로 건넬 수 있었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1초가 아까운 기록의 세계에서 이런 '디테일'이 중요하죠. 킵초게는 세계기록으로 화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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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대회에서 물병을 건네는 일은 하찮게 보이지만 마라토너에겐 중요합니다. (사진='플로트랙'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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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케는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대회가 시작되기 4주 전부터 긴장을 했습니다. 혹시나 물병을 건네지 못하는 실수를 할까봐, 그래서 비난받을까 봐 며칠간 잠을 잘 못잤습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지구촌 가장 빠른 마라토너로 킵초게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뒤엔 물병 든 남자의 작은 기여가 숨어있습니다. 위대한 도전에 작은 도움을 준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뿌듯하다고 말하는 사람.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듯, 마라톤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광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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