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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조용헌 살롱] [1374] 무인의 고장, 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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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쓰는 것은 소재가 문제다. 이 소재를 제공해 주는 인물이 전국 각지의 문화원장들이다. 평균연령 60대 중반이고 밥 먹고 살던 집안 후손들이 맡고 있다. 문화원장들은 그 지역의 인물과 산세, 그리고 향토사를 꿰고 있다. 특히 맛집 주인들과의 관계가 긴밀해서 밥 먹기가 편하다.

경남 기장(機張·행정구역명은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강주훈(66) 문화원장의 강연 요청으로 기장에 갔다. “왜 여기는 이름을 ‘機張’이라고 지은거요?” “기장읍의 주산이 일광산(日光山)입니다. 산 높이는 300m도 안 되는데 문필봉입니다. 문필봉이라 중시한 산이죠. 이 일광산이 옆으로 비단을 걸어 놓은 형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단을 짜는 베틀(機)과 비단이 옆으로 펼쳐졌다고 해서 ‘張’자를 넣은 것으로 봅니다”.

비단이 펼쳐진 형국의 지명과는 다르게 기장은 군사적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었다. 일본이 바로 코앞에 있는 최전선 방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성(城)이 4개나 있었다. 산성(山城)이 있었고, 읍내에는 읍성(邑城)이, 그리고 왜성(倭城)이 있었다. 왜성은 임진왜란때 일본의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바다와 인접한 남산에다가 지은 것이다. 그리고 기장향교 뒷산에는 신라 시대에 쌓은 고성(古城)이 있었다. 요새를 4군데나 구축해 놓은 셈이다.

기장은 고대부터 일본과의 전투가 빈번했고, 그러다 보니 불의를 보면 생명을 거는 무인적(武人的) 기질도 강하게 형성된 동네였다. 왜정때 일본과 싸운 독립 투사도 39명이다. 강 문화원장도 관상이 무인의 상이었다. 선대에 전투를 많이 치러 본 혈통 같다. 장안사 뒤의 골짜기 안에 강주훈의 산장인 만세장안루(萬歲長安樓)가 있어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17m 길이의 백두산 소나무 3그루를 대들보로 쓴 한옥이다. 민가에서 17m 길이 대들보는 기백이 없으면 사용하지 못한다. 집이 바위 골짜기 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터가 아주 쎄다는 느낌이 왔다.

일반인이 살기 어려운 센 터를 40년이나 지키고 있었다니 사연도 있었을 법하다. “30대 후반에 잠을 자는데 고릴라처럼 온 몸에 털이 나고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 인간이 나타나 제 목에 칼을 들이댔습니다. 그 시절에 저도 운동을 해서 몸이 날아 다닐 정도였죠. 순간적으로 저도 그 괴물을 두 손으로 밀쳐냈습니다. 그러니까 사라지더라고요”. 만약 그때 칼에 찔리면 그 터를 뜰 수밖에 없다. 이후로 강주훈은 겸손해졌다. 기운이 센 산에는 지령(地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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