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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동서남북] 하버드 졸업장보다 군 경력이 우선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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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장교로 8년간 아파치 헬리콥터를 조종했습니다.”

지난달 이스라엘 출장에서 만난 4조원 규모 벤처펀드 빈티지(Vintage)의 아사프 호레시 대표는 자신을 소개하며 군 경력부터 꺼냈다. 그는 “군에서 배운 기술 지식이 투자 대상 기업 이해에 도움이 됐다”며 “이스라엘 군 특유의 다른 의견을 인정하는 탈권위 문화(후츠파)는 투자 결정 회의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이스라엘군은 ‘시모네 메타임’ ‘탈피오트’ 같은 엘리트 부대를 통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한 학생들을 최정예 요원으로 길러내고 있다. 군대에서 수년간 창의력과 유연성, 문제 해결력을 키운 이들은 실전에서 신속하게 문제점을 파악하고 최선의 해결 방안을 찾아낸다. 또 제대 후에도 끊임없이 신기술을 개발하며 이스라엘 벤처 산업을 이끈다. 군대가 ‘창업 인큐베이터’ 역할까지 하는 셈이다. 사진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전투 훈련을 하는 모습. /이스라엘방위군(IDF)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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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군은 기업·학교·정부와 함께 ‘스타트업 네이션(창업국가)’을 만들어가는 주체다. 하버드·스탠퍼드 등 글로벌 명문대 졸업장보다 군 경력을 기업에서 더 높이 쳐주는 독특한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호레시 대표도 미국 명문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석사(MBA)를 받았음을 나중에서야 밝혔다.

척박한 자원에 인구 940만명으로 내수시장이 비좁은 이스라엘은 국방 기술을 상용화해 글로벌 시장 문을 두드리고 있다. F16 전투기 첨단 헬멧의 90% 이상을 점유한 엘빗시스템스는 최근 이 기술을 적용해 세계 최경량 오토바이·자전거용 스마트 고글을 개발했다. 미사일 탄두 광학기술을 알약에 장착한 캡슐내시경(필캠)을 개발한 기븐이미징은 2001년 나스닥에 상장됐다가, 2014년 글로벌 제약사 코비디엔에 8억6000만달러에 인수됐다. 테러리스트 금융 거래 추적 기술로 온라인 결제 사기 적발 시스템을 개발한 프로드사이언시스는 세계 최대 간편결제 기업 페이팔이 2008년 1억6900만달러에 샀다. 모사드(이스라엘 대외첩보부)에서 25년간 근무하고 퇴직해 2015년 사이버 보안 회사를 세운 노암 에레즈 대표는 “중동 국가, 바다로 둘러싸여 지정학적으로 섬과 같은 역경에 놓였지만 이를 기회로 바꾸려고 노력한 결과다”고 말했다.

1948년 건국 후 채택한 사회주의 체제의 비효율성에 주변국과의 전쟁까지 겹치며 이스라엘 경제는 1970~1980년 ‘잃어버린 10년’을 겪었다. 1984년 물가가 400% 가까이 치솟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시장경제로 전환하고, 1990년부터 스타트업 육성에 과감히 나섰다. 이 과정에서 엘리트 군부대를 적극 활용했다. 이스라엘 국민은 고교 졸업 후 남자는 2년8개월, 여자는 2년씩 군에 의무 복무해야 한다. 탈피오트 부대는 연간 50명을 선발해 이스라엘 최고 명문 히브리대에서 수학·물리학 등을 3년간 가르치고 6년간 군에서 혁신 무기를 연구하게 한다. 유명한 미사일 방어시스템 ‘아이언돔’은 탈피오트 출신들이 개발했다. 컴퓨터·보안 기술에 특화된 8200 정보부대 출신들이 설립한 스타트업은 1000개가 넘는다.

그 결과 인구 1500명당 스타트업 1개로 세계 1위다. 군소 스타트업들이 포천 500대 기업 20~30%를 고객으로 둔 경우가 수두룩하다. 구글·인텔·마이크로소프트·애플 등 글로벌 대기업들의 R&D 센터 450여 개가 들어와 있다. 1인당 GDP는 1990년 1만3000달러에서 작년 5만2000달러로 4배나 뛰었다. 2015년 일본을, 작년 독일을 제쳤다.

한국은 어떤가. 우리는 대체로 군 복무가 ‘청년들 인생을 허비하는 시간’ ‘흙수저의 몫’ 등으로 치부된다. 더 이상 자원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 작년 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현재 2% 초반인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2044년 0%대로 떨어져 38개 회원국 중 가장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도 성장이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군대까지 활용해 창업 경제를 주도하는 이스라엘을 언제까지 부러운 눈으로 쳐다만 보고 있을 것인가.

[최형석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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