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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미국 최대 쇼핑 대목, 밤샘 텐트족·매장 돌격이 사라졌다 [현장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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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 뜸해지고 온라인 바빠진 '블프' 풍경]
①개점 직후 대폭 할인하는 도어버스터 감소
②코로나19 이후 사람 몰리는 쇼핑몰 경계
③월마트서 발생한 총기난사도 심리적 영향
한국일보

2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남부의 한 베스트바이 매장 앞. 쇼핑객들이 줄을 서서 오전 5시 개점을 기다리고 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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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현지시간) 미국의 연중 최대 쇼핑 대목인 블랙 프라이데이(추수감사절 다음 금요일) 당일 오전 4시 30분. 이 꼭두새벽에도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의 한 베스트바이 매장 앞엔 10여 명이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자제품 전문점인 베스트바이는 평소 오전 10시에 문을 열지만, 이날은 오전 5시로 개점 시간을 앞당겼다. 거의 모든 매장이 경쟁적으로 세일을 하는 날인 만큼, 남들보다 먼저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대기열 맨 앞에 서 있는 카일(63)씨는 새벽 4시쯤 도착했다고 한다. 그는 "TV용 사운드바와 캠핑용 스피커를 사기 위해 이날만 기다려 왔다"면서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어서 놀랐다"고 말했다.

의외로 조용했던 블랙 프라이데이


드디어 5시, 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종종걸음으로 스피커 진열대를 찾은 카일씨는 대폭 할인하는 제품이 보이지 않자 허탈해했다. 50% 이상 할인을 기대했지만, 최대 30%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는 "온라인에서 파는 것들과 차이가 없다"며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이렇게 일찍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뒤 빈손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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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프라이데이였던 25일(현지시간) 오전 6시 30분쯤,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의 한 월마트 매장에서 지역 주민인 그레고리씨와 그의 아들이 6달러짜리 베개를 보고 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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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에 문을 연 인근의 월마트 상황도 비슷했다. 가전 제품을 포함해 모든 제품을 한 곳에서 살 수 있는 종합 대형마트인 만큼 입장 직전 대기 인원이 100여 명까지 늘었지만, "5년 전쯤엔 건물을 빙 둘러설 정도로 많았던 것과 비교하면 오늘은 정말 없는 편"이라고 한 점원은 말했다. 문이 열린 뒤에도 먼저 들어가려 경쟁하는 모습은 없었다. 오전 6시에 맞춰 아들과 함께 온 그레고리씨는 "다른 데선 보지 못한 6달러짜리 베개, 8달러짜리 반찬통 24개 세트 등 생필품 위주로 담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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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프라이데이였던 25일(현지시간) 오전 5시 50분쯤,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의 한 월마트 매장 앞에서 쇼핑객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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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프라이데이였던 2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의 한 월마트. 오전 6시 개점을 기다리던 쇼핑객들이 문이 열리자 차례로 입장하고 있다. 소란은 없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베스트바이와 월마트 모습에서 보듯 미국의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는 예년과 달리 '조용하게' 지나갔다. 팬데믹 기세가 꺾이고 처음 맞는 블랙 프라이데이였지만, 광란의 쇼핑 파티는 없었다. 과거 블랙 프라이데이마다 화제가 됐던 매장 앞 밤샘 텐트족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매장 안으로 돌진하던 구름 인파도 자취를 감췄다. 습관적으로 일찌감치 매장을 찾은 새벽 쇼핑족 역시 예전에 비해 시시해진 할인에 장바구니를 꽉 채우지 않았다.

블랙 프라이데이 풍경이 왜 이렇게 시들해진 것일까? 오프라인 매장에서 '발품'을 팔던 시대가 저물고, 모두 핫딜(좋은 가격)을 찾아 온라인에서 '손품'을 파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당일 파격 세일' 대신 한 달 내내 할인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 당일 매장 열기가 전만큼 뜨겁지 않았던 건 도어버스터(doorbuster)가 대폭 줄어든 게 주된 요인으로 분석된다. 도어버스터는 주로 개점 직후 제한된 시간 동안에만 실시하는 대폭 할인을 뜻하는 말로, 블랙 프라이데이의 전통이자 상징으로 꼽혔다. 미국 소비자들이 블랙 프라이데이 전날부터 줄을 섰던 이유가 바로 도어버스터 제품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어버스터는 온라인 쇼핑이 대세가 되면서 점차 규모가 줄었고, 많은 매장이 문을 닫았던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며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쇼핑 비교 사이트인 딜뉴스닷컴에 따르면, 올해 '도어버스터'란 단어를 사용한 블랙 프라이데이 광고는 지난해의 절반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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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리버모어의 한 대형 아웃렛 내 옷가게에 블랙 프라이데이 할인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블랙 프라이데이를 사흘 앞뒀지만 이미 세일은 진행 중이었다.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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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유통업체들은 할인을 10월부터 일찍 시작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실제 대형마트 타깃은 지난달부터 일요일마다 품목별 세일을 했고, 월마트는 이달 7일부터, 베스트바이도 20일부터 이미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에 돌입했다. 굳이 블랙 프라이데이 당일에 매장을 찾을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백화점 메이시스의 제프 베네트 최고경영자(CEO)는 "도어버스터 제품은 금방 품절되기 때문에 일찍 왔지만 허탕을 친 고객들의 불만이 컸다"며 "소비자들도 원할 때 구입할 수 있도록 할인 기간을 늘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말했다.

여기에 미국 소비자들이 팬데믹을 기점으로 사람이 많이 모인 환경에서 쇼핑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게 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를 불과 사흘 앞두고 버지니아의 월마트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 역시 쇼핑 심리를 위축시켰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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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블랙 프라이데이 하루 전이었던 11월 28일 미국 뉴욕 메이시스 헤럴드 스퀘어점 모습. 오후 5시 문이 열리자 도어버스터를 찾는 쇼핑객들이 밀려들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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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쇼핑은 사상 최대 규모


그러나 쇼핑의 방식이 오프에서 온라인으로 바뀐 것일 뿐, 소비 자체가 줄어든 건 아니다. 올해는 특히 40년 만에 덮친 최악의 인플레이션 탓에, 연중 할인율이 가장 높아지는 블랙 프라이데이에 소비가 집중된 것으로 분석된다.

어도비의 마케팅 데이터 분석 솔루션인 어도비 애널리틱스 집계에 따르면, 25일 미국의 전자상거래 매출은 지난해 블랙 프라이데이보다 2.3% 늘어난 91억2,000만 달러(약 12조3,220억 원)로 집계됐다. 이는 역대 블랙프라이데이 중 최대 규모다. 비베크 판드야 수석 애널리스트는 "소비자들이 집에서 쇼핑하는 편리함에 매료된 덕분에 전자상거래 수요는 여전히 강했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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