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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화물 노동자들은 왜 약자가 아니란 말인가 [아침햇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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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화물연대 파업 엿새째인 29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이 화물연대 노동자들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을 심의하기 위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있다. (왼쪽 사진) 같은 날 오후 이봉주 화물연대 위원장이 경기 의왕시 내륙컨테이너기지(ICD) 제2터미널 앞에서 열린 정부의 업무개시명령 거부 결의대회에서 삭발을 마친 뒤 머리띠를 묶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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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규 |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9일 화물연대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을 의결한 국무회의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집단 운송 거부를 빨리 수습하고 현장에 복귀한다면 정부가 화물운송 사업자 및 운수 종사자의 어려운 점을 잘 살펴 풀어줄 수 있겠지만, 명분 없는 요구를 계속한다면 정부도 모든 방안을 강구해 단호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다.”

고분고분 말 잘 들으면 떡 하나 주겠다는 투다. 수틀리면 국물도 없을 줄 알라는 으름장으로도 읽힌다. 참으로 저열한 인식이 아닐 수 없다. 급기야 다음날, 정부는 전에 줬던 떡까지 빼앗을 수 있다고 심통을 부렸다. 업무에 복귀하지 않으면 안전운임제를 폐지할 수도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도로 위의 최저임금제’라 불리는 안전운임제는 이번 화물연대 총파업의 핵심 쟁점이다. 화물연대는 일몰 조항을 삭제해 제도의 지속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정부는 ‘일몰 시한 3년 추가 연장’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안전운임제 폐지 운운은 아예 판을 깨겠다는 겁박이나 다름없다.

‘백기 투항’하면 어려움을 잘 살피겠다는 말 자체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화물 노동자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과적·과속·과로를 해야 적정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풀려면 꼭 필요한 것이 안전운임제 확대다.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를 ‘명분이 없다’고 일축해 놓고, 어려운 점을 잘 살펴 풀어주겠다는 건 무슨 경우인가.

윤 대통령은 화물연대 총파업을 계기로 ‘반노동 본색’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내놓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노조와 파업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적대감이 짙게 배어난다. 이참에 노조를 제대로 한번 손봐주겠다는 강퍅함만 보일 뿐, 대화의 주체로 인정하려는 태도는 찾아볼 수가 없다. 가장 고약한 건 ‘노-노 갈라치기’ 화법이다.

“연대 파업을 예고한 민주노총 산하의 철도, 지하철 노조는 산업 현장의 진정한 약자들, 절대다수의 임금 근로자들에 비하면 더 높은 소득과 더 나은 근로여건을 갖고 있다. 민주노총의 파업은 정당성이 없다.”

“정부는 조직화되지 못한 산업 현장의 진정한 약자들을 더욱 잘 챙길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개선해나가겠다.”

윤 대통령이 ‘약자의 수호자’라도 된 듯하다. 그런데 곱씹어볼수록 의문이 쌓인다. ‘진정한 약자’인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 때 ‘불법 엄단’ 운운하며 강경 대응을 주문한 사람이 누군가. 여건 좋은 노동자의 파업은 무조건 부당한가. 그렇다면 월급이 얼마나 적어야 파업에 정당성이 있는 건가.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인 화물 노동자들은 조직화되지 못한 산업 현장의 약자가 아닌가. 서울교통공사와 철도노조 요구사항 중엔 임금 등 처우 개선 이외에 안전을 위한 인력 확충과 민영화 중단 등 공공성 강화와 관련된 것도 많은데, 그 얘기는 왜 하지 않는가.

윤 대통령이 화물연대 파업에 강경 대응을 지시하면서 거듭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거론한 것도 생뚱맞기는 마찬가지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임금 등 노동조건의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불안정 노동자인 화물 노동자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민주노총이 ‘귀족노조’이므로 민주노총 소속인 화물연대도 ‘귀족노조’라는 얘기라면, 어처구니없는 궤변일 뿐이다.

윤 대통령이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경제 볼모론’은 또 어떤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국민의 삶과 국가 경제를 볼모로 삼는 것은 어떠한 명분도 정당성도 없다”는 말에 그런 인식이 잘 담겨 있다. 그러나 이는 파업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줄 뿐이다. 파업은 본디 누군가의 피해와 불편을 전제로 하는 행위다. 그래야 정부든 사용자든 대화 상대방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낼 수 있다. 파업을 ‘노동자의 유일한 무기’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경제 볼모론’은 ‘파업 불가론’과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은 걸핏하면 ‘불법 파업 엄단’ ‘법과 원칙’을 되뇐다. 도대체 뭐가 불법이란 말일까. 정부 판단을 따르자면 화물차 기사는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다. 개인사업자가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면서 영업을 쉬겠다는 게 왜 불법인가. ‘노조할 권리’ 요구에는 귀를 막더니 이제 와서 ‘불법 파업’ 운운하는 건 무슨 원칙인가. ‘불법 행위’는 업무개시명령을 거부한 뒤에야 성립한다. 그것도 ‘정당한 사유 없이’라는 전제가 충족돼야 한다. 파업 시작하자마자 ‘불법’ 타령을 할 일이 아니다.

요즘 윤석열 정부의 태도를 보면 ‘민주노총과의 전쟁’을 역사적 소명으로 여기는 듯하다. 경제 여건이 어렵다면서, 이렇게 노동자들을 정부에 등 돌리게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왜곡된 노동관이 오히려 한국 경제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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