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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시진핑이 처음 톱뉴스에서 밀렸다… 中, 장쩌민 대대적 추모 나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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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 메인 뉴스서 사망보도 40분한 뒤 시진핑 등장

1997년 덩샤오핑 추모와 동급으로 예우

”정부가 추모 분위기 주도해 시위 막으려는 의도”

시위대는 “단속 강화되니 좀 지켜보자”

조선일보

지난 달 30일 중국 베이징 시내에 있는 한 대형 스크린에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사망 소식이 방송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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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지난 30일 별세한 장쩌민 전 국가주석을 대대적으로 추모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홍콩 명보는 1일 중국이 장 전 주석에 대해 1997년의 덩샤오핑 사망 때와 동급으로 국가적 예우를 갖췄다고 보도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 등은 장 전 주석의 부고를 알리면서 ‘전당, 전군, 전국 각 민족에게 보내는 서한’의 형식을 채택했다. 이런 형식은 중국에서 마오쩌둥, 덩샤오핑이 사망한 이후 세번째로 취한 것이다.

서한은 장 전 주석에 대해 “중국 특색 사회주의 위대한 사업의 걸출한 영도자이자 당의 제3대 중앙영도자 그룹의 핵심으로 ‘3개 대표 중요 사상’의 주요 창립자”라고 표현했다. 장 전 주석에 대한 호칭도 덩샤오핑 사망 당시와 같은 호칭을 사용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시진핑 국가주석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가 꾸려졌다고 30일 전했다. 장례위원회의 인적 구성은 덩샤오핑 사망 때와 비슷했다고 명보는 보도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 위원, 부총리급 이상의 전직 관리, 각 부처 당 위원회와 국유기업 수뇌부, 홍콩과 마카오 특구 수반, 공산당 이외 정파의 상무 부주석, 장 전 주석을 치료했던 의사 3명과 경호 책임자도 포함됐다.

장례위원회는 추모대회가 열리는 날까지 베이징 톈안먼, 신화먼, 인민대회당, 외교부, 홍콩과 마카오 연락판공실, 재외공관에 조기를 게양해 애도하고, 홍콩과 마카오 연락판공실, 재외 공관에 빈소를 마련해 조문을 받기로 했다고 밝혔다. 관례에 따라 외국 정부, 정당 대표나 우호 인사에게 조문하도록 초청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명보는 중국 정부가 5일 고인의 시신을 화장한 뒤 6일 국장(國葬) 격인 ‘추도대회’를 엄수할 것으로 예상되며, 그 자리에서 시진핑 주석이 추도사를 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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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중국 톈안먼 광장에 걸린 중국 오성홍기가 장쩌민 전 주석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조기로 게양돼 있다./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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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전 주석의 시신이 매장될 것인지, 화장될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사망 이후 시신이 보존돼 베이징 마오쩌둥 기념관에 안치됐다. 1997년 2월 19일 타계한 덩샤오핑은 유언에 따라 각막을 기증하고 시신은 해부용으로 제공됐으며 유해는 화장돼 중국과 대만 사이 바다에 뿌려졌다.

이날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와 신화통신 등은 일제히 홈페이지를 흑백으로 처리해 조의를 표했다. 국영 CCTV의 메인 뉴스인 신원롄보(新聞聯播)는 전체 1시간여 방송 중에 장 전 주석 사망 소식을 48분 동안 내보냈고, 그 뒤에 시 주석 관련 뉴스가 나왔다. 시 주석이 메인뉴스에서 이번처럼 늦게 등장한 것은 최근 10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라고 명보는 분석했다. CCTV의 웨이보 계정에는 100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명보는 이런 대규모 애도 분위기 조성에 대해 “(고인의) 중국 정계 영향력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그를 성대하게 기리는 것이 현 지도자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백색시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애도 분위기를 주도해 시위대가 장 전 주석의 사망을 기폭제로 삼는 것을 막는 의도 또한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일각에서는 장 전 주석의 사망이 최근 중국의 백지 시위를 자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89년 톈안먼 시위는 후야오방 총서기의 사망에서 촉발됐기 때문이다. 후야오방은 1982년 총서기에 올랐지만 1986년 발생한 학생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로 1987년 실각했다. 그는 1989년 4월 사망했고, 두 달 뒤인 6월에 톈안먼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장 전 주석의 사망이 중국에서 시위 확산의 동력이 되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장 전 주석은 톈안먼 시위를 계기로 권력을 잡았고, 파룬궁 등 종교 집단을 탄압했던 전력이 있어 후야오방과는 상징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 시위 참가자들이 모인 소셜미디어 단톡방에서는 “장 전 주석의 별세 이후 당국의 시위 단속이 강화될 수 있으니 당분간 활동을 줄이자” 등의 의견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베이징=이벌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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