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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쟁점화 말라”는 이태원 참사 책임자들의 궤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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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이태원 참사와 정치적 프레임


한겨레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1일 서울 마포구 서울경찰청 이태원 참사 특별수사본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진짜 책임자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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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에 많이 놀러 가는 계곡이나 해수욕장 같은 데를 상상해보자 . 매해 여름철마다 물놀이 장소에서 수난사고는 수천건씩 일어나고 사망사고는 십수건씩 일어난다 . 이 수많은 불운한 사고들이 건마다 정쟁화되지 않은 이유는 말 그대로 불운한 사고인 탓이기도 하고 , 수영 미숙 , 안전 부주의 , 음주 수영 등 원인 소재가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일 것이다 .

그런데 만약 같은 휴양지에서 열명 이상이 한꺼번에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다면 , 혹은 유난히 한곳에서 해마다 비슷한 유형의 안전사고가 발생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구명조끼 혹은 튜브 관리가 부실했거나 , 유속이 빠르고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는 구간에 대한 관리 감독이 부실했다는 정황이 있었다고 할 때 , 안전 관련 규제 및 제도가 미흡하지는 않았는지 , 그렇다면 언제 어떤 이에 의해 규제가 완화되었는지 , 혹은 제도는 완비되었으나 업체에서 그것을 전혀 준수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누가 어떤 이유로 그것을 묵인했는지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

“참사, 쟁점화 말라”는 정치인


이러한 조사와 규명 , 그 이전에 문제 제기 ,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 등은 일반 시민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 피해자 , 희생자 유족들로서는 경황이 없어 그러한 문제의식을 갖는 것조차 어려운 일일 수 있고 , 누구를 향해 무엇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는지 알기도 어려운 일이다 . 이때 나서는 집단이 시민단체 , 활동가 , 정당이다 . 피해자 , 희생자 유족 대신 쟁점을 제시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당국에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바로 ‘정치 쟁점화 ’다 . 정치 쟁점화는 당연히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이러한 정치 쟁점화의 소중한 가치는 지금 ‘정쟁화 ’라는 말로 축소되고 부정되고 있다 . 정쟁화란 , 다름 아닌 정치 쟁점화의 줄임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 정쟁화를 하지 말자는 말은 정치를 하지 말자는 말과 다를 바 없다 .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이야기되는 정쟁화라는 말은 다만 ‘정치 전쟁 ’ 혹은 ‘정당 전쟁 ’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모든 쟁점화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 묻기라도 하면 어떤 순수함이 떨어지는 오염물질과 같은 것으로 이용되고 있다 . 집권한 보수세력이 정치 혐오를 조장하기 위해 정치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쓰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 과거 이명박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정치적 논리로 접근하지 말라 ’는 것이었음을 상기하면 더욱이 그렇다 .

정쟁화하지 말라는 말을 다름 아닌 정치인들이 한다는 것도 황당한 일이지만 , 이 말이 진보 진영 일부에서 나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 10·29 이태원 참사의 경우 , 희생자 명단을 유족들의 사전 동의 없이 공개한 행동에 이견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의 행동을 정쟁화 프레임에 묶어서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명단 공개와 정쟁화는 별개의 문제다 . 명단 공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는지와는 무관하게 , 명단 공개를 ‘정쟁화 ’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체의 정치적 쟁점화의 시도를 다만 희생자들과 유족들을 당파적으로 ‘이용 ’하는 행태로 축소해버리는 프레임을 강화할 위험이 크다 .

명단 공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 일부 진보 성향 논자들은 이태원 참사가 시스템 및 제도의 부재 , 즉 사회적 문제임을 지적하면서 참사의 책임을 집권 여당 정치세력에게 물으려는 야당 진영의 공세에 의구심을 표하고 이것을 이른바 ‘정쟁화 ’로 축소하고 있다 . ‘사회적 문제 ’는 어느 세력이 집권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며 , 제도적 ·사회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을 정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 혹자는 심지어 지금의 여당이 아니라 야당이 집권했어도 비슷한 참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

이처럼 모든 것을 제도 , 시스템의 결함 탓으로 돌리고 최종적으로 사회 ·구조의 문제로 환원하는 ‘사회주의 ’는 일체의 정치적 행위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참사에 대한 모든 정치적 접근을 무가치한 것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 이들은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정쟁화 ’를 구별하려 하지만 둘을 확실히 구별하는 방법은 없다 . 구별을 해내기 위해서는 제도권 의회 정치 , 대의제 정치를 넘어선 완전히 새로운 의미의 정치를 상상해내야 한다 . 그러면서 결국 논의가 양당제 비판 그리고 다당제 정립을 주장하는 데로 귀결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 어쨌건 이러한 고난도의 작업은 당연히 가치가 있는 일이겠으나 시급히 참사의 책임 소재부터 가리는 것이 중요한 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공허한 고담준론으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 책임 소재를 가리는 데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다 .

사회구조 탓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를 생각해보자 .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으나 세월호의 침몰 원인으로 많은 사람이 무리한 증설 및 개조 , 과적과 과속 항행 등을 꼽았다 . 또한 2008년에 있었던 규제 완화로 인해 여객선의 선령 제한이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되었고 노후한 선박 시설 및 구명장비들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 이러한 점에서 세월호 침몰 원인은 사회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소설가 박민규가 말했듯, 참사의 본질은 선박이 침몰한 ‘사고 ’가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 ’이다 . 선박이 천천히 침몰하는 동안 당국이 넋 놓고 있었던 것까지 사회구조 탓으로 돌리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 결국 제도, 시스템을 운용하고 당국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이고 ,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다 .

2020년 한국 사회가 코로나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 한동안 실종되었던 공공성 개념이 조금이나마 회복되는 듯 보였다 . 재난 상황에서 공공성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남을 보호하는 것이 곧 나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약속을 시민들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 국가를 운용하는 지도자들의 몫이다 . 10월 29일에 이것이 다시 사라졌다 . 그리고 그 책임 소재는 아주 명확하다 . 이것을 정쟁화해야 한다 .



첫 책 <프로보커터>에 이어 <급진의 20대>를 썼고, <인싸를 죽여라>를 번역했다. 한국의 20대 현상과 좌파 포퓰리즘, 밈과 인터넷커뮤니케이션 같은 디지털 현상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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