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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기적과 이변 속출하는 카타르 월드컵… ‘말라 레체’ 사라진 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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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배준용 기자의 월드컵 톡톡]

지난 2주간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카타르 월드컵 조별 예선 경기가 어느덧 마무리 됐습니다. 조별 예선 마지막 날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포르투갈을 꺾고 16강에 진출하는 기적을 연출했죠. 포르투갈을 이기더라도 우루과이와의 골득실까지 따져야하는 어려운 상황을 기적처럼 뚫어낸 대한민국 대표팀, 정말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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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전(한국시각)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며 16강 진출에 성공한 대표팀이 기뻐하며 그라운드를 달리고 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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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겨운 건 대한민국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전 세계 축구 팬들 사이에선 “이번 월드컵이 역사상 가장 재미있는 월드컵”이란 반응이 적지 않습니다. 약팀이 강팀을 잡는 이변에 여러 징크스가 줄줄이 깨지는 등 흥미로운 사건들이 많았기 때문이죠. 한국을 비롯해 일본과 호주, 모로코 등 예상 밖의 팀들이 16강에 오르는 이변이 이어졌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우선 이례적으로 11월에 열린 월드컵이라는 게 먼저 꼽힙니다. 월드컵 전에는 “11월에 월드컵이 열리면 한창 유럽에서 시즌을 소화하고 온 선수들이 많은 강팀이 유리할 것”이란 전망이 있었습니다. 시즌을 끝내고 피로감이 큰 아시아권 선수들보다 한창 시즌을 진행하고 온 유럽 쪽 선수들이 더 좋은 경기 감각과 체력을 가지고 활약할 것이란 얘기였죠.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11월 월드컵이 문제를 일으킨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월드컵 전까지 빡빡한 시즌 일정을 소화하면서 피로가 더 누적됐고, 핵심 선수가 부상으로 이탈한 강팀이 적지 않습니다. 월드컵 1주 전에야 대표팀에 소집되면서 팀원 간 호흡을 맞출 시간도 부족했죠. 반면 시즌을 일찍 마치고 월드컵을 준비한 아시아 팀들에는 컨디션을 회복하고 조직력을 다지는데 더 호재였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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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한국 시각) 대한민국과 포르투갈 경기와 같은 시간대에 열린 우루과이와 가나와의 경기에서 우루과이 공격수 에딘손 카바니가 경기 막판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가나 수비수와 부딪혀 넘어진 뒤 '페널티킥이 아니냐'는 식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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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정 기술의 발전으로 이른바 ‘말라 레체(Mala Leche)’가 줄어든 것도 또 다른 요인입니다. 말라 레체는 스페인어로 직역하면 ‘상한 우유’라는 뜻인데, 보통 비신사적 행위나 매너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축구계에서는 주로 남미권 선수들이 심판의 눈을 피하거나 교묘하게 속여 반칙을 저질러 자기 팀에 유리한 판정을 얻어내는 행위를 말라 레체라고 부르죠. 사실 남미권 축구에서는 이를 축구의 중요한 기술로 여기고 적극 활용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세계적인 선수 중에서도 말라 레체를 활용해 논란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죠.

하지만 지난 월드컵부터 비디오 보조 심판(VAR)이 도입된 데 이어 이번 월드컵에서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반자동 오프사이드 판독 기술이 도입됐습니다. 불완전한 사람의 눈에 의존하던 판정을 이제는 각종 첨단 기술이 맡아 인간의 오류를 잡아내고 있죠. 자연히 심판들도 더 공정하고 정확한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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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일본과 스페인의 카타르 월드컵 E조 3차전에서 후반 6분 일본의 미토마 가오루가 공이 골라인을 벗어나기 직전 크로스로 연결하는 장면. 이 크로스는 다나카 아오의 결승골로 연결됐다. 득점이 된 후 심판들은 라인 아웃으로 판정했지만, 비디오 판독(VAR)을 진행한 결과 라인 아웃이 아닌 골로 인정됐다./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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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 조별 예선 경기 44경기 중 VAR 등으로 판정이 번복된 사례가 22번에 이른다고 합니다. 첨단 판정 기술이 경기 결과에 그만큼 큰 영향을 미친 것이지요. 특히 이번 대회부터는 오프사이드 라인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들던 공격수들도 밀리미터 차이까지 잡아내는 오프사이드 판독 기술을 속일 수 없게 됐지요. 우연일지 몰라도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와 남미권 팀들이 이번 월드컵에서 유독 고전하는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아시아 축구의 성장과 전 세계 축구의 상향 평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 ‘축구는 인종적 차이가 실력에 큰 차이를 준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최근 스포츠 과학이 발달하면서 “한 나라의 축구 실력은 그 나라의 축구 인기와 전문적인 교습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 밝혀졌죠.

인터넷과 스트리밍 서비스의 발달로 EPL이나 스페인 라 리가 등 최상급 축구 경기를 지구 어디서든 볼 수 있게 됐고, 과학적인 훈련 방법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축구 변방이라고 불리는 아시아에서도 좋은 선수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한국이 포르투갈을 꺾고 16강에 진출한 것도, 일본이 독일과 스페인을 꺾고 16강에 진출하며 아시아 최초 2연속 월드컵 16강 진출을 달성한 것 역시 두 나라 모두 축구 인기의 상승과 좋은 선수들을 장기적으로 육성한 노력이 합쳐진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선진적인 선수 육성 시스템도 축구 상향 평준화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중동의 이민자와 난민들을 적극 수용한 유럽에서 선진적인 축구 훈련을 받고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 이민·난민 가정 2세들이 다시 고국의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2대3으로 꺾은 가나도 유럽에서 세계적 선수로 성장한 선수들이 많고, 피파 랭킹 2위 벨기에를 꺾은 모로코도 벨기에에서 성장해 모로코 국가대표가 된 선수가 적지 않죠. 인종과 국적을 가리지 않고 좋은 선수들을 육성한 시스템이 월드컵의 상향 평준화와 갖가지 이변에 기여한 셈입니다.

축구 팬들에게는 즐거운 이변과 기적이 속출하고 있는 카타르 월드컵은, 이제 16강으로 접어듭니다. 16강전에선 또 어떤 이변과 기적이 이어질지, 대한민국 대표팀이 다시 한 번 멋진 경기를 보여줄 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배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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