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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하버드대 졸업생은 왜 반복해서 취업에 실패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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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전공 후 기자를 꿈꾼 여성, 언론사 입사 여러번 거절 당하다 남자 이름으로 써내자 즉시 합격

조선일보

편향의 종말

제시카 노델 지음 | 김병화 번역 | 웅진지식하우스 | 500쪽 | 2만2800원

우리 사회엔 무수한 차별과 편견이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다. 자신이 그 희생자가 되기 전까진. 책은 대학 졸업 이후 사회의 차별적 구조를 느끼게 됐다는 저자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하버드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기자가 되기 위해 여러 언론사에 기사 계획을 제안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몇 달 동안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저자는 몇 글자를 수정해 메일을 보낸다. 그러자 하루도 지나지 않아 긍정적인 답을 얻게 된다. 바뀐 것은 발신자의 이름 하나. 자신의 이름 ‘제시카 노델’을 지우고, 그 대신 남자 이름을 적은 것이다.

“편향으로 인한 억압과 불이익은 이미 당신의 일부가 되어 있어서, 이것을 억압이라고 느끼지도 못할 정도다.” 오늘날 대부분 암묵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편견과 차별은 그 대상이 되는 개인의 행동, 그리고 삶을 바꿔 놓는다. 저자는 미국 뉴욕타임스(NYT), 워싱턴 포스트(WP)에 과학 기사를 기고하는 저널리스트. 자신이 당한 암묵적 차별을 계기로 편견이 만들어지는 이유와 작동 과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지과학과 사회심리학 실험 결과들을 토대로 무의식적으로 뇌 속에 자리 잡는 편견을 교정할 수 있는 방법들을 소개한다.

우리는 고정관념이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왜 자꾸만 편견에 빠질까? 저자는 “고정관념이 우리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의 뇌는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예측이 맞았을 때 쾌감을 느끼는데, 퍼즐 조각의 위치를 예측하고, 그것이 제자리에 맞아 들어갔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비슷하다. 반대로 예상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면 짜증스러워지고 위협받는 느낌이 든다. 미국의 한 심리 실험에 따르면, 자신을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다고 소개한 라틴계 학생들과 교류한 백인 학생들에겐 혈관이 수축되고 심장이 빨라지는 등 ‘위협을 받을 때’ 나타나는 신체 신호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는 ‘조용한 차별주의자’다.

무의식으로 나타나는 편향은 취업 기회부터 시작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회적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2020년 5월 미국에선 위조지폐 사용 혐의로 백인 경찰이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플로이드가 비무장 상태인데도 바닥에 눕히고 목을 무릎으로 짓눌러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미국 사회의 흑인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은 의료 서비스에서도 나타난다. “유색인 여성은 증상을 말해도, 간호사와 의사가 믿지 않을 확률이 높다. 대개 신뢰성 없는 과잉 행동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저자는 흑인 여성이 출산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비율이 백인 여성의 3~4배 수준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암묵적인 편향이 때로 노골적인 차별보다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편향적 사고’가 인간의 본능이라면, 이로 인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저자는 사람들에게 ‘차별은 나쁜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 대신, 사람들이 특정한 행동을 하게끔 유도하는 ‘행동 설계’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에선 ‘검진 매뉴얼’을 만들어 의사가 환자를 볼 때마다 위험 요인을 단계적으로 점검한다. 검진이 끝나면 자동화된 프로그램이 환자에게 맞는 치료 방법을 의사에게 권고한다. 제안된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의사는 그 이유를 기록해야 한다. 혈전증 환자들을 대상으로 이 검진 목록을 도입하자, 재입원한 환자 수가 90% 감소했다. 또 남성과 여성에게 모두 같은 예방 대책이 권고되어 치료에서의 성별 격차 역시 완화됐다. 저자는 “편향적 사고에 대한 직접적인 ‘계도’보다는, 결정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부정적 결과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편견은 문화의 산물이다. 편견이 자라나는 토양 자체를 바꾸는 것도 해결책 중 하나. 스웨덴의 한 유치원에선 아이를 가리킬 때마다 ‘그(he)’나 ‘그녀(she)’라는 대명사 대신 이름만을 불렀다. 남자아이들이 눈물을 흘려도 그만 울고 싶어질 때까지 울게 놓아두었고, 시끄럽고 거칠게 구는 여자아이들을 꾸짖지 않고 내버려뒀다. 이 실험의 결과는 간단한 교육이 편견을 바로잡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유치원의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를 소개받았을 때 자신과 같은 성별의 친구를 선택하고 친해지는 확률이 다른 유치원보다 월등히 낮게 나타났다.

“편향적 사고의 문제는 누군가를 판단하고 평가할 때, 어떤 가정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 가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2018년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도착했을 때, 이들이 성범죄 등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혐오감에 의한 편견이 확대·재생산됐다. 무지(無知)는 두려움과 혐오를 낳고, 이 과정에서 더 강력한 편견이 만들어진다. 무의식 속 편향을 바로잡는 데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몇 개의 단편적인 특성만으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사람의 뇌는 ‘편향적 사고’를 추구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인지적 안전지대(comfort zone)에 머무를수록 다른 누군가는 불편을 겪게 된다. 세상을 보는 방식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원제 The End of Bias.

[윤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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