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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김택근의 묵언] “당신들은 왜 정치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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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들어섰다. 달력 마지막 장에는 쓸쓸함이 묻어있다. 지난 한 해의 아쉬움이 스며있다. 딱히 잡히는 것은 없고 마음만 바쁘다. 돌아보면 지구촌도, 한국도 다사다난했다. 지구의 숨은 더 가빠지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지금도 전쟁의 포연이 인류의 양심을 뒤덮고 있다. 인간이 그토록 오랫동안 갈고닦았던 이성도 실은 별것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도 불이 산을, 물이 마을을 삼키고 할퀴었다. 고운 가을밤에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경향신문

김택근 시인·작가


연말 모임이 잦다. 역병 창궐 이후 거의 3년 만에 날아온 안내 문구는 사뭇 들떠있다. 마침내, 드디어 얼굴을 보게 되었다며 살아있음을 확인하자고 한다. 동시대에 지상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함께 햇살을 쬐는 사람, 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술잔을 부딪치면 세상이 환해진다.

한 가지,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다보니 달라진 게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정치 얘기가 줄어들었다. 또 그걸로 싸우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정치인을 입에 올리면 술자리가 썰렁해진다. 자연 정치 얘기로 얼굴 붉히는 일이 드물어졌다. 자신과 성향이 다르면 자리를 피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예전처럼 흥이 돋아나지 않는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를 실감했을 것이다.

정치 얘기를 기피하는 것은 정치에 신물이 났음이다. 정치가 건강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지금 정치판은 그만그만한 정치인들이 서로 막말을 퍼부으며 날마다 먼지를 일으키고 있다. 또 지역으로, 세대별로, 계층별로, 성별로 갈라치기를 서슴지 않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는 아예 민심 갈라치기로 표를 얻겠다며 이를 공공연하게 선거 전략으로 내놓았다. 우리가 팬데믹과 싸우는 동안 그렇게 민심을 무섭게 갈라놓았다. 국민들은 이를 지켜보며 절망하다 이제 체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정치권 행태를 꾸짖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갈라서서 서로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으니 점잖은 훈수는 이내 묻혀버리고 만다.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먹물들도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적으로 몰아세우는 풍토를 개탄하다가 어느 순간 특정 진영에 몸을 담그고 후일을 도모하고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몸집을 키운 거대 양당은 자신들의 성곽만을 높여갈 뿐이다.

“싸우는 양쪽 사이에 이해와 소통은커녕 그게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조차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워런 버핏은 ‘썰물이 빠져나가면 누가 벌거벗고 수영하는지 드러난다’고 했지만, 정치엔 투자나 투기와는 달리 그런 판별 기회조차 없다. 과거엔 이 국가적 내분, 아니 내전을 중단하자고 외칠 무게 있는 지식인들이 있었지만, 디지털 혁명의 부작용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어느 한 진영에 자신의 안락한 둥지를 틀고 증오의 선전선동 메시지를 생산해내는 지식인들만 있을 뿐이다.”(경향신문 ‘강준만의 화이부동’)

따지고 보면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도 나쁜 정치의 피해자들이다. 끊임없이 구실을 만들어 상대를 공격하는 저들의 주술에 넘어간 사람들이다. 이제 갈라진 진영에는 어떤 반대 논리도 들어갈 틈이 없다. 어쩌다 괜찮은 정치인이 등장하면 집단으로 따돌려버린다. 바른 소리가 길이 되지 못하고, 쓴소리가 약이 되지 못한다. 그 속에서 양심을 판 자, 국민의 이름을 판 자들이 끼리끼리 뭉쳐서 영달을 누리고 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이 나쁜 정치를 하면 이를 바로잡는 길 역시 정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금으로서는 나쁜 정치인들을 퇴출시킬 마땅한 방법이 없다. 국민들을 이쪽저쪽으로 갈라놓고 자기들끼리 공천을 주고받으면 그만이다. 국민들이 개입하고 심판할 여지가 거의 없다. 요즘은 노동자들의 파업까지도 그 배후를 의심하고 있다. ‘정치적 파업’이라는 말로 정치를 끌어들여 진영 싸움으로 몰아가고 있다. 갈등을 조장하고 혐오를 부추긴다. 이대로 가면 공멸이다. 정치판 전체를 갈아엎는 혁명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앞으로 정치개혁이 없다면 중대한 국면을 맞을 수도 있다.

둘러보면 어느 구석 성한 데가 없다. 국민들이 현명하지 않았다면 이미 무너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은 모든 현안을 이분법으로 재단하여 결국 정쟁으로 몰아간다. 이러다 대한민국은 내전 상태를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 정치인들은 어디를 보고 있는가. 왜 그 자리에 있는가. 정치를 잃어버린 정치인들. 국민들이 묻고 있다. “당신들은 왜 정치를 하는가.”

김택근 시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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