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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스프] 시위에 놀란 시진핑, '제로코로나' 포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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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위드코로나'로 넘어가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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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북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구도인 우루무치(Urumqi). 고층 아파트 건물에 불이 났다. 10명이 숨졌다. 지난 11월 24일의 일이다. 코로나19 봉쇄로 겹겹이 설치된 장애물 때문에 소방차와 소방관 진입이 늦어,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여론이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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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4일 신장 우루무치 아파트 화재 현장. 비디오에서 캡처.AP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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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는 문을 열 수 없도록 밖에서 문을 봉쇄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과 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포됐다. 과도한 방역 조치 탓에 중국 각지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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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제로코로나 봉쇄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 있겠다'는 불안, 3년 가까이 지속된 통제에 대한 염증이 확산됐다. 시위가 폭발했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건 11월 마지막 주말 상하이 시위였다. 일찍부터 국제화된 도시인 상하이에는 신장위구르 출신들이 모여사는 동네가 있다. 신장 위구르는 그렇지 않아도 베이징 중앙정부로부터 탄압을 받는 소수민족 지역이다. 상하이는 올 봄 오미크론 확산기에 혹독한 봉쇄 조치를 경험했다. 올가을 시진핑 3기 집권 과정에서 상하이 출신 당 간부들이 대거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여러가지 이유로, 상하이와 신장 위구르의 결합은 휘발성이 컸다. 시위에선 '공산당 물러가라, 시진핑 물러가라' 구호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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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모닝와이드(11.28) 7시뉴스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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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에 중국인들 마음에 불을 지른 또 다른 시위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11월 23일 정저우 소재 폭스콘 공장의 소요 사태가 대표적이다. 이날 낮부터 시작된 공장 직원들의 시위에는 1980년대 한국 군사독재 시절의 백골단을 방불하는 진압경찰 투입이 있었다. 이들이 시위 노동자들을 무차별 구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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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한 노동자들은 더욱 과격하게 시설물을 부수며 밤늦게까지 경찰과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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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베이징은 지난 10월 22일 시진핑 3기 집권 확정 때까지 강력한 보호 버블 안에 있었다. 베이징서 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다시 들어가기는 굉장히 까다로웠다. 그래서 감염도 적었다. 그러다 11월 들어 베이징의 감염자가 급증하고, 다른 지역 사람들은 이미 경험한 갑작스럽고 강도높은 구역 봉쇄를 당하는 주민이 늘었다. 11월 마지막 주말의 시위는 수도 베이징까지 확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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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까지 시진핑과 공산당 지배를 겨냥한 구호가 나왔다는 점에서, 수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상황,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평가도 외신에서 잇따랐다. 50여 개 대학에서 자유를 외쳤고, 청두 시위에서는 "종신 황제 필요없다"는 외침도 나왔다. 27일(일)-28일(월)에 걸쳐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로 벌어진 시위는 중국 공산당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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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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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버그 통신은 '1989년 텐안먼 사태 이후 첫 통일된 저항 표시'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시위 참가자들을 텐안먼 사태 당시 '탱크맨'에 비유하는 소셜미디어 게시물도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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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8일경 푸단대학 교수 2명이 학생들 보호를 위해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을 1989년 텐안먼 시위와 비교한 트위터 게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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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독약 분사기를 든 방역요원들을 텐안먼 당시 탱크부대처럼 묘사한 풍자 카툰. 트위터 @visegrad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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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1989 텐안먼 사태처럼 커질까?



1989년 텐안먼(천안문) 사태는 4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두 달 가까운 진행 과정을 거치며 커졌고,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반부패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평화시위에 20만 넘는 인원이 나섰다. 지금은 미디어가 발달해 시위 이미지가 많이 퍼져서 그렇지 시위 규모는 수백 명 단위로 작고 지속기간도 짧다. 지역별로 거주지 인근에서 시위가 일어나는 양상이어서, '천안문 광장'이라는 상징성 큰 장소에서 벌어졌던 당시 시위와 같은 선상에 놓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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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안먼 광장을 가득 메운 시위대. 1989년 5월4일.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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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당시는 베를린 장벽과 구소련이 무너지고 세계적으로 공산당이 퇴조하는 흐름 속에서 개혁개방 요구가 싹트는 상황이었다. 공산당내 권력도 강경보수파와 개혁파로 나뉘어 당내 갈등이 있었다. 그런 여러가지 환경이 겹쳐 시위가 커졌고, 베이징 공안 일부까지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상황이 그쯤 되니 원래 개혁개방을 표방했던 덩샤오핑이 계엄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투입해 무자비하게 진압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에는 학생운동권과 노동운동권에서 성장한 지도부가 있었다. 반면 이번에는 아직 그렇게 지도부가 발달했다고 보기 어렵다. 해외에 망명한 유명 반체제 인사도 이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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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당시에는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사망이 시위 확대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후야오방은 고위층 부패를 단속하려 했고 개혁과 당내 민주화에 동조적이었다가 보수파의 압력에 밀려 1987년 사임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이 개혁을 요구하는 대중에게 불을 당겼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은 죽고,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네."라는 당시 대자보가 유명하다.

이번에는 상하이방의 수장이었던 장쩌민 전 주석의 사망이 시위 확산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으나, 공산당이 미리 불씨를 없애는 작업에 나섰다. 시진핑 3연임 확정 과정에서 어차피 장쩌민 세력을 당내에서 무력화시켜 놓았으므로, 이제는 위협이 되지 않는 장쩌민에 대한 사후 예우를 극진히 함으로써 시진핑 수뇌부에 대한 불만의 소지를 차단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공산당은 시위에 대한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진압 인력의 수적 우위가 확보된 곳에서는 저항능력이 없는 시민을 거칠게 다루는 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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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에 외세 개입'...중국 당국 경고의 의미



주말 동안 인민의 분노 에너지가 어느 정도 분출됐다고 본 중국 당국은 주초부터 시위 참가자들을 색출해 소환조사하기 시작했다. 소환통보를 받은 일부 참가자들이 로이터 등 외신에 제보해 알려진 사실이다.

시위영상과 집결 연락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검열도 강화됐다. 거리에서 시민을 붙잡아세워 휴대폰을 검열하는 모습도 곳곳에서 목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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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은 지나친 코로나19 봉쇄로 못살겠다는 아우성을 넘어 당과 시진핑에 대한 공격으로 시위가 넘어가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방침도 천명했다. '외세 개입설'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중국에서 코로나19는 미국 등 외세와의 대결이 걸린 안보 사안이기도 하다. 코로나19 방역을 대서방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수행해 왔다. 따라서, '외세 개입'을 꺼내든 건 시위가 선을 넘을 경우 국가안보 차원에서 다루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관영언론인 등 당의 나팔수들이 일제히 이런 기조의 메시지를 내기 시작했다. 후시진 환구시보 전 편집장은 "최근 민감한 사건들이 다른 세력에게 쉽게 이용될 수 있다"고 했고 국수주의 논객 스마난은 "외국 정보요원들은 민감한 사건의 불씨를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외교부도 신장 우루무치 화재로 촉발된 시위에 외세가 개입했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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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에서 '레드라인'을 넘지 않기 위한 자발적 움직임이 나오기도 했다. 시진핑 국가주석과 당을 규탄하는 구호가 나오자 "함부로 말하지 맙시다"며 자제를 요구하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고, "우리는 평범한 베이징 시민이다" "우리는 해외세력이 아니다"라는 구호도 많이 나왔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제로코로나 고수? 방역 완화? '오락가락'으로 비친 중국 정부의 입장



사태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제로코로나를 고수한다는 건지 완화한다는 건지, 중국 당국 스스로 혼선을 키운 측면이 있다. 일단 중국 안팎에선 시진핑 3연임을 확정하는 10월 하순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대신 당 대회 이후에는 뭔가 변화가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컸다. 10월 16일 당 대회 초반에 시진핑이 제로코로나 방침을 고수한다는 연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1월 첫주 증시에서는 '리오프닝' 기대감에 따른 반짝 상승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11월 5일 국무원 합동방역 관리부처 기자회견에서 재차 제로 코로나 기조를 고수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날씨가 추워지고 일부 지역에선 방역 조치가 느슨해지면서 확진자 급증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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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진자를 줄이기 위한 고강도 봉쇄는 경제를 엉망으로 만든다. 고심 끝에 중국 당국은 제로코로나의 기조 자체는 손대지 않은 채 방역정책 '최적화, 효율화'라는 슬로건을 내건다.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11월 10일 회의를 열고, '진일보된 최적화조치' 20가지를 발표한다. 해외입국자나 밀접 접촉자의 격리기간 축소, 확진자가 나온 항공편에 대한 운항정지를 철회하는 것 등의 내용을 담았다.

11월 15일에는 중국 문화여유(관광)부가 후속조치를 발표했다. "성(省)을 넘나드는 중국 내 이동을 할 경우 더 이상 출발지가 코로나19 고위험 지역인지 여부에 따른 연동 관리를 시행하지 않는다. 또한 48시간 내 PCR(핵산) 검사 음성 확인서가 있으면 이동 수단 탑승이 가능하다"는 등의 내용이다.

제로 코로나 기조 자체는 유지하지만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식의 무리한 방역 조치는 삼가라는 취지로 읽힌다.

중앙 따로 현장 따로… '최적화 방역' 지시해도 현장선 '모르쇠'



이런 방안이 즉각 잘 집행됐다면 시위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방침이 현장에선 잘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앙의 지시 뒤에는 습관성 후렴구처럼 "다이내믹 제로 코로나 방침을 확고부동하게 관철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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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식 D콘텐츠 제작위원(hyunsik@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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