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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2002년 감동 품고… “다시 공개될 날 기다립니다” [김동환의 김기자와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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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수장고의 대형 태극기

한·일 월드컵 당시 경기장 뒤덮고 달궜던

길이 60×40m 무게 1.5t의 대형 태극기

모두를 하나로 만든 현대사 중요 사료로

붉은악마, 월드컵 이후 흔쾌히 기증해줘

박물관 ‘옛것’에만 집중 고정관념도 깨져

월드컵 시즌, 다시 선보일 계획이었지만

이태원 참사로 무산… “공개는 다음으로”

2002년 6월29일 대한민국과 튀르키예(터키)의 ‘2002 한·일 월드컵’ 3·4위전이 열린 대구월드컵경기장. 당시 국립민속박물관 관계자들 시선은 골대 뒤쪽 관중석을 뒤덮으며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 ‘대형 태극기’로 향했다. 대표팀 응원단 ‘붉은악마’와 사전 협의를 거쳐 이 태극기는 월드컵 후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의 수장고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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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 서울 수장고 보관 당시 태극기를 일광 소독 중인 관계자들의 모습.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다시 경기 파주에 있는 수장고로 옮겨져 보관 중인 대형 태극기는 한·일 월드컵을 앞둔 2002년 대구에서 탄생했다. 현지 깃발 제조업체가 천값만 받고 붉은악마 회원들과 만든 것으로 알려졌으며, 같은 해 4월27일 인천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세로 60·40m에 무게 1.5t으로,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역할을 대회 기간 해냈다. 선수들에게는 투지를 불어넣었고, 응원에 나선 국민은 애국심으로 불타올랐다. 국가적 축제에서 세대와 이념을 초월해 국민과 함께했고, 모두가 하나 될 수 있었던 우리 현대사를 대표하는 자료가 됐다.

◆‘붉은악마’도 흔쾌히 응한 태극기 기증… ‘옛것’ 집중한다는 고정관념도 깨졌다

지난달 29일 국립민속박물관 파주관에서 만난 김창호 학예연구관은 TV 중계에서만 보던 태극기를 마주하고 나서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태극기 등 월드컵 응원용품을 모으는 데 앞장선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김 연구관은 “일반적으로 대형 태극기를 박물관에서 기증받으리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 않다”며 “월드컵이 끝나고 태극기를 기증하기로 붉은악마에서 흔쾌히 응했다”고 전했다.

박물관이 ‘옛것’에만 집중한다는 고정관념은 이때 깨졌다. 당시 우리나라 경기가 있던 날 거리응원 현장에서 쓰인 용품도 수집했다. 국민 생활과 밀접한 물품 모으기에 힘쓰던 박물관은 응원용품이 ‘2002년을 표현할 좋은 장치’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였다. 대형 태극기와 함께 유니폼 등 월드컵 열기를 고스란히 담은 다양한 물품이 수장고에 함께 잠든 이유다. 한국인의 생활문화를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교육의 터전을 목표로 박물관 측은 서울과 파주 수장고에 관련 유물 약 17만점을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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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 월드컵 앞두고 ‘2002년 증명하는 독보적 존재’ 공개 계획 세우기도

국립민속박물관은 올해 카타르 월드컵과 맞물려 대형 태극기를 대중에 공개할 방침이었다. 축구팬들이 한데 모여 대표팀을 응원할 수 있는 경기장과 같은 장소에서 선보인다는 계획이었다. 한·일 월드컵 20주년을 맞아 그때를 기억하는 세대에 추억을 선물하고, 이를 모르는 세대에는 좋은 이벤트가 될 것으로 기대도 컸었다. 그러나 서울 이태원 참사 등으로 대규모 응원이 불가능해진 탓에 공개 계획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국제적인 체육 행사가 있을 때 태극기 공개 관련 논의를 다시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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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이 수장고에 보관 중인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응원용품.


수장고에 들어가면 안전한 보관을 위해 가급적 꺼내지 않는 게 좋지만, 유물의 가치와 의미는 대중에 공개될 때 조금 더 풍부해지기도 한다. 박물관이 ‘공개’와 ‘보존’의 균형을 항상 염두에 두는 이유다. 앞서 우리 삶에 깃든 ‘색의 의미’를 조명한다는 취지로 2016년 전시회 ‘때깔전’에서 2002년 응원용품과 유니폼 등을 붉은색 주제 코너에 선보인 일은 좋은 사례다.

대형 태극기는 ‘2002년 당시’, ‘대표팀의 경기가 펼쳐지는 곳에서’ 등으로 수식할 수 있는 남다른 존재여서 의미가 크다. 이후에도 다양한 크기의 태극기가 경기장에 등장했지만, 한·일 월드컵 당시 관중석을 덮은 대형 태극기는 오로지 하나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독보적 가치를 지닌다. 같은 맥락에서 수장고에 잠든 다른 응원용품들도 후세에 큰 함의를 전달할 것으로 보인다.

김 연구관은 “모든 사물에는 사람의 경험이 깃든다”며 “월드컵 자료를 볼 때마다 과거가 떠오르는 이유”라고 했다. 이어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이 잠든 물건에 반응을 많이 한다”며 “그런 점에서 대형 태극기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경험한 이라면 바로 알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물 중 하나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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