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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고문 피해 3층서 투신…경찰, 치료비 내주고 ‘침묵 각서’ 요구[그 시대, 유죄추정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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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학생·노동운동 전력 이유로 경찰에 납치됐던 복영호씨

경향신문

1980년대 경찰에 체포돼 불법 감금됐던 복영호씨(61)가 지난달 2일 경기 김포시의 한 공장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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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낯선 천장 아래서 눈을 뜬 복영호씨(당시 26세)는 주위를 둘러봤다. 온몸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고 경찰 한 명이 병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병원에 누워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실한 건 병실의 소독약 냄새, 부러진 허리와 머리뼈를 찌르는 고통, 그리고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감각뿐이었다.

기억을 되찾은 건 며칠 뒤였다. 진통제가 고통을 잠시 줄여주자 복씨는 자신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의 사찰을 받았으며, 책을 복사하다가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쇠창살, 지하, 고통스러운 고문, 창문. 몇 가지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기억의 편린을 이리저리 조합한 끝에 복씨는 자신이 3층에서 뛰어내려 경찰서를 탈출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복기했다.

복씨는 붕대를 갈러 온 간호사에게 “집에 전화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간호사는 복씨를 강도살인 사건 용의자로 알고 있었다. 형사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살인범으로 몰려 집에 전화 한 통 못한 복씨를 도운 사람은 X레이 촬영기사였다. 헐레벌떡 병실을 찾은 복씨의 가족에게 경찰은 “치료비를 전액 지급하고 다시는 불법 수사하지 않겠다”고 적힌 각서를 들이밀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을 비밀에 부치는 조건이었다.

복씨는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몸이 성치 않다. 약속대로 언론에 피해 사실을 제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은 수년간 그를 사찰했다. 복씨는 인터뷰에서 “망가진 인생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겠지만 국가의 폭력을 기록으로 남기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도 신청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달 4일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경향신문

1987년 복영호씨가 감금됐던 당시 경기 수원경찰서와 인근 전경. 독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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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집에서 납치…차에 욱여져 경찰행

복씨가 경찰에 끌려간 이유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전력 때문으로 추정된다. 복씨는 1980년 한양대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했다. 그해 5월 광주에서 돌아온 친구들의 증언이 계기가 됐다. 육군사관학교 1기 출신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복씨에게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충격 자체였다. 그길로 복씨는 경기 수원시에 있는 야학에서 노동자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이후 복씨는 한양대 교내 나무 위에 올라가 ‘민주화투쟁 선언서’를 배포한 혐의로 1982년 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야학서 노동자에 공부 가르치고
학내 민주화운동하다 징역살이
삼성전자 취업해 노조 만들자
“수원서·삼성 협조, 24시간 사찰”

복씨는 구치소에서 나온 1982년 10월29일부터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점조직을 만들어 대학 때처럼 노동자들에게 사회과학을 가르쳤다. 1984년 복씨가 삼성전자에 취업해 최초로 노조를 만들자 경찰은 이 조직을 ‘복씨 조직’이라 부르며 그를 본격적으로 사찰하기 시작했다.

복씨는 “수원경찰서가 삼성과 협조해 24시간 감시한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면서 “삼성전자 인사과에 있다가 퇴직한 분께 들어보니 저에 대한 사찰 자료가 2m가 넘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또 “그때 우리 조직에서 노동운동가가 많이 배출됐다”면서 “당시 조직원 규모가 70명 수준이었고, 핵심세력만 15명에서 20명 가까이 됐다”고 했다. 복씨는 조직 활동이 적발돼 삼성에서 해고된 뒤에도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연행 때 뺏은 ‘노동운동조직도’로
‘조직’ 일망타진 기회 여긴 경찰
기억 잃을 정도로 가혹한 고문
투신으로 두개골·척추 등 골절

1987년 5월 복씨는 수원역 앞 복사집을 찾았다. 복사물을 받고 문을 나서려는 순간 사복 경찰 4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다짜고짜 복씨를 검정 세단에 밀어넣고 폭행했다. 무슨 혐의로 체포됐는지,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른 채 주먹질과 발길질을 맨몸으로 받아냈다.

당일 복씨 가방에는 노동운동 조직도와 가명으로 작성된 몇 가지 자료가 담겨 있었다. 복사집 주인은 복씨가 불온서적을 복사한다고 의심해 경찰에 신고했고, 사복 경찰은 복씨를 불심검문해 검거했다. 경찰로서는 가명을 쓰며 숨어지내던 복씨 조직을 일망타진할 절호의 기회였다. 경찰은 질문 대신 몽둥이를 택했다. 수원경찰서 지하실로 끌려간 복씨는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맞았다. 복씨는 “후유증으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면서도 “계단이 매우 어두웠고, 중간중간에 철창이 있었다”고 했다.

며칠 뒤 형사는 복씨를 지하에서 꺼내 건물 3층으로 데려갔다. 복씨는 “우연히 나를 잡았다고 형사가 자랑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형사들 사이에서 왁자지껄한 대화가 오가던 중 복씨의 눈에 창문 하나가 들어왔다. 냉장고 반 크기의 작은 창문이었다. 얼마나 높을지, 떨어지면 살 수 있을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형사가 한눈을 판 사이 복씨는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창문이 깨지며 12m 아래로 추락한 그의 몸은 차량에 부딪힌 뒤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복씨의 두개골과 척추 등 총 17곳이 골절됐다.

복씨 결국 ‘무혐의’ 드러나자
경찰 불법 감금·고문 감추려
“기사화 말라”며 병원비 제안

복씨는 이틀 뒤 병원에서 눈을 떴다. 경찰은 자신들이 별다른 범죄 혐의가 없는 복씨를 불법 감금하고 고문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치료비를 대납하겠다고 제안했다. 경찰서장부터 말단 형사들까지 복씨의 치료비를 내기 위해 돈을 모았다. 복씨는 “당시 경찰관들이 아버지에게 문서를 가지고 왔는데, 위에 손글씨로 ‘수사를 종결하고 치료비 일체를 낼 테니 기사화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적혀 있었다”며 “본문과 사인 사이에 공간이 비어 있길래 사인을 본문 바로 밑으로 올리라고 요구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복씨는 그날의 충격으로 더는 공장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왼쪽 팔은 접힌 채로 굳어서 펴지지 않았다. 방광 근처 뼈와 골반도 부러진 상태였다. 내장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임신부처럼 배가 불룩해질 때까지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감각이 돌아왔다. 하지만 걸을 수 없는 건 똑같았다. 복씨는 “먹고살기 위해 사무직에 취직했다”며 “앉아서 일하다 보면 허리가 너무 아파 서너 시간은 천장에 몸을 매달아야 했다”고 말했다. 수년간의 긴 재활 끝에 복씨는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노동운동 현장으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실종 9년 후 시신으로 돌아온 동지 박태순

복씨는 경찰이 1987년 불법 감금 당시 가방에서 빼간 ‘복씨 조직’ 조직도를 바탕으로 노동운동가들을 탄압했다고 의심한다. 경찰이 입수한 조직도에는 1992년 8월29일 실종됐다가 9년 뒤 시신으로 발견된 한신대 85학번 박태순씨의 이름도 있었다. 박씨는 복씨와 함께 수원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당시 국군기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는 박씨와 그 동지들을 미행·감시했다. 복씨는 “태순이가 죽은 해 경찰이 나를 찾아와 동선을 물었다”면서 “(박씨는) 수사 대상에 오를 이유가 없었는데 저를 잡고 나서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따라다녔던 것 같다”고 말했다.

복씨가 진실규명을 신청한 이유는 국가폭력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다. 복씨를 고문했던 경찰관들은 지금 수사기관에 남아 있지 않다. 수원경찰서는 새로 지어져 복씨가 갇혔던 지하실도 없어졌다. 병원도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복씨의 의료기록 역시 사라진 상태다.

당시 민주화운동은 시대의 강요
많은 이들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
국가폭력 기록 자체가 의미

복씨는 “당시 내가 했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은 선택이라기보단 시대의 강요였다고 생각한다”며 “시대가 20대 젊은 청년에게 운동도, 투신도 강요했다면 책임 역시 국가가 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위 ‘진보팔이’라고 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치권에 있는 일부”라면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많은 사람들이 고문 후유증 등으로 비참하게 살고 있다. 이걸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복씨는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내서 진실규명에 나서라고 당부했다. 그는 “배상과 보상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시민을 상대로 폭력을 행했다는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자체도 유의미하다”며 “비슷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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