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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슈 미술의 세계

"1초에 200만원"···'억' 소리 나는 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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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되는 복고의 값비싼 영수증]
'응답하라 1988'서 사라진 손기정·임춘애 성화 운반 장면
"1초에 200만 원" 소환 어려운 올림픽·월드컵의 추억
과거 재현한 '재벌집 막내아들' 제작비 현대물의 3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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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도준(송중기)이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 JTBC 방송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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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기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서 유통되고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사라진 1988년 서울올림픽 경기 장면. 2015년 본 방송 때 이 장면엔 '마라톤 영웅' 고 손기정 선수가 임춘애 선수에게 성화를 넘겨주는 모습이 송출됐다. 티빙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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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선생이 생전인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화주자로 참여해 잠실 올림픽운동장을 뛰고 있는 모습. 손기정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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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 연휴에 김승우(가명)씨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을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서 다시 보다 화면 곳곳이 '블러'(흐림) 처리된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마라톤 영웅' 고 손기정 선생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이었던 임춘애 선수에게 성화를 넘겨주는 장면과 덕선(이혜리)이 '피켓걸'로 등장하기 직전 나온 요르단 선수단 입장 장면 등 1988년 서울 올림픽 영상들이 모두 뿌옇게 가려진 탓이다. 김씨는 "구독료를 내고 보는데 꼭 어둠의 경로로 불법 유통되는 콘텐츠를 보는 것 같아 왠지 찜찜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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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기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서 유통되고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사라진 1988년 서울 올림픽 경기 장면. 요르단 선수단 입장 장면이 블러(흐림) 처리됐다. 티빙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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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올림픽 관련 영상이 갑자기 사라진 건 저작권 문제로 사용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응답하라 1988' 제작 관계자는 "처음엔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본부에 연락해 1년 반인가 2년 사용을 전제로 돈을 내고 88 올림픽 영상을 썼다"며 "그 기간이 끝나 재계약을 (비용 문제 등으로) 안 해 블러 처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26일 기준, 이 드라마엔 영화 '영웅본색'(1988)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경찰 아걸(장국영)이 켄(주윤발)의 가슴에 기대 공중전화 부스에서 아내와 통화하는 장면과 그룹 뉴키즈 온 더 블록 공연 영상 등이 그대로 쓰이고 있었다. 시대를 풍미한 세계적 스타들의 '몸값'(초상권)보다 88 올림픽의 추억이 더 '비싼'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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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방송된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조세호가 들고 있는 2022 카타르 올림픽 경기 사진 화면에 '자료비 아껴'란 자막이 띄워져 있다. tvN 방송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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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비 아끼려" '유퀴즈' 자막의 속사정

'꿈은 이루어진다'(2002 한일 월드컵)부터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2022 카타르 월드컵)까지. 여러 세대의 추억이 듬뿍 깃든 굵직한 국제 스포츠 이벤트의 영상 사용료는 얼마나 될까. 여러 방송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카타르 월드컵 경기 영상을 드라마나 예능에 자료 화면으로 쓸 경우 1초에 200만 원 수준이다. 5초 사용이면 1,000만 원꼴로 유명 방송인의 예능 회당 출연료와 맞먹는 액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제작진은 지난달 방송된 카타르 월드컵 국가대표 출신 김민재와 황인범 선수 편에서 우루과이와의 경기 도중 김 선수가 손흥민 선수에게 소리쳐 화제를 모은 영상 대신 사진을 내보냈다. 화면엔 '자료비 아껴'란 자막이 띄워졌다. 제작진이 궁여지책으로 비싼 영상 대신 사진을 써 제작비를 졸라맨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콘텐츠 시장에서 추억의 힘은 막강하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신드롬을 일으키고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유년 시절을 추억하는 3040세대를 'n차 관람'으로 극장가로 불러 모으는 배경이다.

하지만, 추억을 소환하는 대가로 '출혈'이 따르는 게 콘텐츠 시장의 냉정한 현실이다. 송중기가 'Be The Reds'가 적힌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한일 월드컵을 응원하는 등 현대사의 여러 순간을 소품과 세트로 직접 만들거나 과거 영상을 총동원해 재현한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무려 352억 원의 제작비가 쓰였다. 총 16부작인 이 드라마의 회당 제작비는 22억 원으로 요즘 드라마 평균 제작비(7억~8억 원)의 2.5배를 웃돈다. 복고가 치른 값비싼 영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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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진양철(왼쪽·이성민) 순양그룹 회장의 서재. 미술팀이 20세기 재벌가 사택풍으로 모두 제작했다. JTBC 방송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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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만들려는 제작사 없었다"

이렇게 제작비 부담이 큰 데다 고증에 대한 시청자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제작사들은 과거를 다루는 콘텐츠 제작에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설 연휴 직전에 JTBC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12월 시청자위원회 회의자료를 보면, 이수영 사장은 "웹소설 원작인 '재벌집 막내아들'을 2018년에 드라마로 만들기로 확정했다"며 "당시 원작에 독자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했지만 다른 제작사들이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데 굉장히 부담을 느껴 드라마로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걸로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 추억을 자극하는 콘텐츠가 분명 '돈'이 되지만 고증 부실이나 왜곡 논란이 불거지면 역풍을 맞을 가능성도 커서다.

신원호 PD는 과거를 오롯이 재현하는 게 흥행의 성패를 좌우하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제작하고 "직업병"이 생겼다. "'슬기로운' 시리즈 등 현대극을 찍으면서도 천장에 달린 에어컨이나 건물에 새 주소가 붙어 있으면 깜짝깜짝 놀란다"는 게 그의 말이다. 신 PD는 "'응답' 시리즈는 소품이나 문화상품이 지닌 추억의 힘이 중요한데 그 저작권이나 초상권을 글로벌로 다 풀어가면서 하는 게 쉽지 않고 '돈 어디다 썼니' 하는데 (그런 것들을 사용하면서)그렇게 대작이 된다"며 복고 콘텐츠 제작의 고충을 들려줬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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