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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이슈 미국 46대 대통령 바이든

"내 거야" 기밀문서 몽땅 짐쌌던 닉슨…바이든·트럼프는 억울? [영화로운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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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사전 >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

국제 뉴스는 너무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낯선 땅의 사람들에게 금세 감정 이입이 되죠. 영화를 통해 더이상 ‘먼 나라’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국제 뉴스를 전합니다.

1973년 백악관 집무실. 어둠 속에서 '정말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녹음테이프를 반복 재생하고 있는 이 남자. 대체 뭐기에 이토록 집착하는 걸까요. 영화 '닉슨' 속 이 장면을 유심히 보세요. 요즘 미국을 뒤흔들고 있는 '대통령 기밀문서 논란'의 시작점이거든요.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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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닉슨'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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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현직 대통령의 기밀문서 유출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습니다.

'국가 재산'인 기밀문서가 조 바이든 대통령의 개인 사무실에서 발견된 건데요. 특검까지 꾸려져 지난 20일(현지시간)에는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바이든의 사저를 압수수색 하기까지 했죠. 트럼프 정부에서 일했던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의 집에서도 기밀문서가 나왔습니다. 지난해 8월 FBI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마러라고 리조트를 압수수색 해 기밀문서를 발견한 데 이은 일이라 미국민의 충격은 큰데요. 2024년 대선을 앞두고 이 논란이 어떻게 흐를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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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대통령이 기밀문서를 사저에 보관하고 있었단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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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80년간 대통령 '개인 재산' 취급받던 기밀문서



그런데 바이든과 트럼프는 내심 억울할지도 모릅니다. 1789년 미국이 건국된 이후 약 180년 동안 미국 대통령들은 자신의 손을 거쳐 간 각종 자료를 '개인 재산' 취급했거든요. 퇴임하면 온갖 서류뭉치를 집으로 싸 들고 가 보관하곤 했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문서는 폐기하기도 했죠. 그 때문에 미국 정부의 초기 기밀문서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사라졌고, 남북전쟁(1861~1865년) 땐 불태워지는 등 갖은 수난을 당했습니다. 창고에서 쥐가 갉아먹어 없어진 문서도 상당수란 기록이 있죠.

기밀문서 등 대통령 기록물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이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재임 1901~1909년, 공화당)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룬 문서를 의회 도서관에 기증했죠. 후임자들은 루스벨트의 이런 모습을 따랐지만, 문서 기증이 의무사항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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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FBI가 압수수색을 진행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마러라고 리조트.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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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대통령의 기밀문서가 소중한 '국가 재산'으로 인식된 건 언제부터일까요? 아니, 누구 때문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영화 속에서 홀로 녹음테이프를 반복해 듣던 남자,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재임 1969~1974년, 공화당)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워터게이트'로 사임한 닉슨 이후 '국가 재산' 인식 생겨



닉슨은 1972년 재선에 성공했지만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수렁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1972년 6월 남자 5명이 민주당 선거사무실을 불법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게 시작이었죠. 닉슨 재선 캠프에서 벌인 일이었는데, 언론의 끈질긴 취재로 백악관이 이 사건과 깊숙이 얽혀있단 게 알려지며 일이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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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 워싱턴DC 워터게이트 호텔의 모습. '워터게이트 사건'은 당시 민주당 선거사무실이 있었던 이 건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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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은폐를 지시했던 닉슨은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지만, 한 측근이 '대통령 집무실에선 모든 대화가 녹음되고 있다'는 폭탄 발언을 해버리죠. 녹음테이프를 내놓으란 대법원과 줄다리기 끝에 닉슨은 일부 녹취록을 제출하기로 하는데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테이프를 광적으로 반복 재생하는 그의 처절한 모습이 바로 이 영화의 묘미입니다. 닉슨은 녹취록을 정리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화를 내요.

"난 유대인 얘기한 적 없는데? 지워. 검둥이란 표현도 있잖아? 지워. 욕한 것도 지워. 다 지우란 말이야!"

테이프는 '내 것'이니 마음대로 하겠단 뜻이었죠. 결국 대법원은 테이프 원본을 내놓으라고 하고, 그가 은폐를 지시했단 진실 역시 밝혀집니다. 여론이 돌아서며 탄핵당할 위기에 처하자 닉슨은 1974년 8월 사임하죠. 그런데 이때, 닉슨은 테이프를 비롯한 모든 기밀문서를 몽땅 캘리포니아 사저로 가져가려 합니다. 그러자 의회는 '대통령 기록물 및 자료 보존법'을 부랴부랴 통과시켰고, 닉슨은 결국 기밀을 포함한 4200만 페이지에 달하는 문서를 토해내죠. 테이프는 죽는 날까지 내놓지 않고 법정공방을 벌였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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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저녁 뉴스를 진행한 최초의 여성 앵커 바버라 월터스(오른쪽)가 1980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과 인터뷰하는 모습.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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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의 테이프에서 시작된 어마어마한 정치 스캔들로 충격받은 미국은, 그제야 대통령 관련 자료가 개인의 것이 아니란 걸 깨닫습니다. 1978년 '대통령기록법(Presidential Records Act)'을 제정해 기밀문서를 비롯한 대통령 기록물을 '국가 재산'으로 명확히 규정하죠. 이에 따르면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은 재임 기간 모든 문서를 퇴임 직후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으로 옮겨 보관해야 합니다. 닉슨 '덕분에' 생긴 이 법을 바이든과 트럼프, 펜스가 모두 어긴 거죠.



기밀문서는 점점 늘어나는데 관리는 부실



미 언론은 바이든이나 트럼프에도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시스템이 취약하다고 지적합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대통령이 서류가방에 넣어 가져가든 화장실에 들고 가 찢어버리든 누구도 이를 감독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부통령의 기록은 더욱 부실하게 관리되고 있다"고 꼬집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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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닉슨'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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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관련 기술 발전으로 정부 문서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단 점도 문제입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 4300만 페이지였던 문서는 1990년대 빌 클린턴 정부 시절엔 약 2배로 늘었죠. 양이 너무 많으니 중요도를 분류하는 일도 곤욕입니다. WP는 "수사도 철저히 해야 하지만 보다 세부적인 법 정비가 시급하다"고 설명하죠.

영화 속에서 닉슨은 유독 "내 거야" "내 테이프야"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대통령의 모든 자료를 '국가 재산'으로 정의하는 지금의 미국과 비교하면 참 이상한 장면이지만, 결국 그런 닉슨 때문에 관련 법이 생겼다니 흥미롭죠.

바이든과 트럼프, 펜스는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까요? 적어도, 닉슨의 불명예 퇴진으로 끝을 맺는 영화 결말을 따르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용어사전 > 영화 '닉슨'

할리우드의 거장 올리버 스톤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삶을 다룬 이 영화는 1995년 개봉해 그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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