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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세계 경제는 러시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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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구정은의 현실지구

러시아의 덤핑경제


한겨레

지난해 12월 러시아 에너지기업 가스프롬네프트 앞에 연료탱크를 실은 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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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휴양지 다보스의 4층집. 빨간 발코니에 ‘인도 최대 경제 마하라슈트라’, ‘웰컴 투 마하라슈트라’라는 글이 쓰여 있다. 해마다 이곳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 일명 ‘다보스포럼’에 맞춰 인도 마하라슈트라주가 매입한 건물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 집의 이름은 ‘러시아 하우스’였다. 러시아 경제무역장관을 지내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자문을 맡고 있는 막심 오레시킨, 푸틴 측근 겐나디 팀첸코가 지분을 가진 화학회사 시부르 등이 이 건물을 사서 2018년부터 운영해왔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집의 운명은 바뀌었다. 이 건물에서 지난 19일 열린 조찬 모임에서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미국 <시엔엔>(CNN) 방송 진행자 퍼리드 저카리아와 대담을 했다. 또 다른 방에서는 우크라이나 부총리가 미국 테크 기업 팰런티어와 만나 러시아군에 맞서도록 도와준 데이터 소프트웨어에 찬사를 보냈다.

유럽 경제에 ‘러시아’ 없으면 어때


러시아가 벌인 전쟁이 다음달이면 1년이 된다. 철 지난 제국주의 야심을 다시 불러내 이웃나라를 공격하고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푸틴의 러시아에 맞서 국제사회가 한 것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주거나 무기 살 돈을 주는 것, 그리고 러시아를 제재하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지원은 일관되거나 신속하지 못했고, 러시아 제재도 ‘아직까지는’ 큰 효과가 없었다.

수치로 보면 러시아 경제가 서방의 의도처럼 무너지지는 않았다. 작년 국내총생산(GDP)이 8~10%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지만 실제론 3~4% 위축에 그쳤다. 러시아는 전쟁 전에도 오랫동안 제재를 받아왔고, 자급자족 시스템을 어느 정도는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국영기업과 주요 은행들은 국제 결제와 외국 계정이 막히고 공급처가 끊길 것에 대비해 스트레스 테스트를 했다. <로이터> 집계에 따르면 서방 기업들이 발을 뺀 러시아 자동차 시장의 3분의 1은 중국 차가 차지했다. 스타벅스가 떠난 자리에 ‘스타스커피’가 들어서는 식으로 브랜드가 바뀌었을 뿐, 식료품점 선반에는 여전히 재고가 있으며 ‘삶은 계속되고’ 있다.

전쟁으로 에너지값이 올라간 덕이 컸다. 러시아가 석유와 가스를 팔아 번 돈은 지난해 1~11월 1642억달러(약 203조1천억원), 전년 같은 기간보다 30% 늘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진다면?

가스프롬은 지난해 상반기 2조5천억루블(약 44조7천억원)의 기록적인 순이익을 냈고 국가가 그 절반을 가져갔다. 하지만 하반기 수익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유가는 하락세다. 개전 직후인 지난해 3월 유럽에서 브렌트유는 배럴당 140달러로 치솟았지만 연말에는 70달러로 반토막 났다.

게다가 주요 7개국(G7)과 유럽연합(EU), 오스트레일리아는 지난해 12월부터 배럴당 60달러 이상은 안 주겠다며 ‘유가상한선’을 만들었다. 2주 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올해 석유와 가스로 버는 돈이 24% 줄어들고 예산 적자는 애초 예상치인 국내총생산(GDP)의 2%보다 더 늘어날 수 있다고 걱정했다. 미국 민간 싱크탱크 윌슨센터 등의 분석에 따르면 유가가 배럴당 10달러 하락할 때마다 러시아 정부 수입은 1조루블 줄어든다.

루블화 가치는 폭락했고 인플레이션 압력은 커졌다. 전쟁 직전 러시아의 금리는 20%였다. 중앙은행은 작년 내내 금리를 낮추다가 인플레 우려가 커지자 10월에 인하를 중단했다. 올해에도 루블화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전쟁 비용은 갈수록 불어난다. 지난해 러시아 정부의 총지출은 애초 계획보다 많은 30조루블(약 540조원)을 넘어섰다. 군사비 지출은 3조5천억루블로 정해져 있었지만 훌쩍 넘겼을 것으로 보인다.

재정이 모자라면 국부펀드 돈을 끌어다 쓰는 방안과 대출이라는 방안이 있다. 재무장관이 거론한 대책도 이 두가지다. 그런데 국부펀드 규모가 크다 해도 화수분은 아니다. 작년 정부가 쓴 돈 가운데 2조루블은 국부펀드에서 끌어다 쓴 것이었으며 그 대부분인 1조5천억루블은 연말 한달 동안 새어나갔다. 가스프롬 세금을 올린 것뿐 아니라 정부는 스베르반크와 로스네프트 같은 국영기업들로부터 받는 배당금도 올렸고, 국민들의 연기금도 당겨썼다.

그래도 모자라는 전쟁 자금은 채권을 발행해서 메웠다. 지난해 국채를 팔아 3조루블 넘게 모았는데 대부분이 4분기에 이뤄졌다. 조달을 쉽게 하려고 변동금리형 채권을 늘리다 보니 그 비율이 어느새 40%에 육박한다.

푸틴 정부의 3개년 재정계획에 따르면 올해 총지출은 작년과 비슷하지만 돈 쓸 곳이 바뀌었다. 안보 분야 예산이 작년에는 예산의 24%였는데 올해는 33%로 늘었다. 전쟁 비용에 덧붙여질 것으로 보이는 ‘비밀 예산’도 16%에서 22.4%로 늘었다. 몇몇 지역은 동원된 군인들의 장비 보급비를 줄이려고 징병한 사람들을 자원봉사자로 취급한다는 뉴스도 있다.

지난해 산업생산이 거의 줄지 않았다고 러시아 정부는 주장하지만, 무기 생산과 군사비 지출을 끼워 넣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생산은 거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22~50살 30만명이 전쟁에 끌려간 바람에 지디피가 0.5% 줄었다는 분석도 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러시아를 떠난 사람이 50만~100만명이라는데, 그 노동력 손실과 두뇌 유출은 장기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푸틴의 전쟁을 막지 못한 정치적 책임을 경제 침체라는 징벌로 때워야 할 판이다. <포린 폴리시>의 표현을 빌리면 “세계 경제는 더 이상 러시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2021년 러시아산 가스의 83%가 유럽으로 갔고 연방정부 수입의 약 절반이 거기서 나왔다. 최소한 러시아는 에너지 분야에서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는 달라졌다. 유럽은 가스 공급의 40~45%를 러시아에 의존했는데 그 비중이 작년에는 7~8%로 떨어졌다. 푸틴은 에너지를 인질로 잡고 유럽을 길들이려 했지만 이 겨울 유럽은 얼어붙지 않았다.

석유 시장에서도 ‘을’ 처지


2016~2021년 유럽인들은 평균적으로 겨울철 한달 반 동안 저장고에 있는 가스의 17.5%를 썼다. 미국 윌슨센터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뒤 첫 겨울에 저장고에서 가져다 쓴 가스는 12.5%로 오히려 줄었다. 유럽은 녹색 에너지로 더 빨리 가는 길을 택했고, 러시아는 유럽 시장을 스스로 내팽개쳤다.

석유 시장에서도 러시아는 ‘을’이 됐다. 지난해에 유럽이 사지 않은 만큼 인도, 중국, 터키가 러시아 기름을 사 갔다. 이 나라들은 브렌트유보다 배럴당 30달러 이상 싼 가격에 수입한다. 러시아 우랄 유가가 배럴당 50달러라 하지만 실제로는 브렌트 가격의 절반인 38달러 선에서 거래된다. 러시아의 자리는 계속 줄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경제 고립이라는 현실에 익숙해지고 있고, 세계는 ‘러시아 없는 경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신문기자로 오래 일했고,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10년 후 세계사> 등의 책을 냈다.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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