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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실종 뒤 이름조차 잃은 동생들, 58년 만에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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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경찰서, 유전자 대조로 찾아내 4남매 상봉 성사

경향신문

58년 전 두 동생과 헤어진 장희재씨(왼쪽)가 31일 동생을 만나 오열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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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재씨(69)는 문 너머로 걸어 들어온 중년 여성의 얼굴을 살폈다. 자신과 같은 모양으로 볶은 머리, 짙은 쌍꺼풀. 희재씨는 58년 전 7세 동생의 얼굴을 찾았다. 잠깐의 어색한 눈빛이 오간 뒤 희재씨는 여성을 가슴팍에 끌어안았다. 희재씨는 58년간 쌓아온 그리움을 울음으로 쏟아냈다. “어릴 적 희란이 얼굴이 아직 있네…. 어떻게 살았어? 학교 다닐 때 기억나? 갑자기 잃어버려서….”

서울 동작경찰서는 31일 오후 2시 ‘장기 실종자 4남매 상봉식’을 가졌다. 희재씨 신고로 수색에 착수한 경찰은 최근 유전자(DNA) 대조로 실종자 장희란씨(65·실종 당시 7세)와 막내 장경인씨(63·실종 당시 5세)를 찾아냈다. 희재씨와 둘째 장택훈씨(67)는 이날 58년 만에 잃어버린 동생들을 만났다.

장씨 4남매가 헤어진 건 1965년 3월이다. 희란씨와 경인씨는 엄마 손을 잡고 전차에 올랐다가 실종됐다. 경인씨는 “전차에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엄마가 없었다”며 “내리다가 손을 놓쳤던 거 같다”고 말했다. 경찰은 노량진역 대합실에 덩그러니 놓인 이들에게 이름을 물었다. 희란씨는 엄마를 잃어버린 충격에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직 발음이 서툴렀던 경인씨는 자신의 이름이 ‘장정인’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희란은 혜정으로, 경인은 정인으로 이름이 바뀐 채 보호소로 보내졌다.

경인씨는 실종 이후 힘든 삶을 보냈다고 말했다. “아동보호소에서 18세가 되면 퇴소를 해야 해요. 저희는 자립금도 없이 나갔거든요. 학교에서도 등록금을 안 냈다고 쫓겨났어요. 고등학교도 다 독학으로 다니고….”

희재씨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83년 희재씨는 KBS 프로그램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서 희란씨와 경인씨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희재씨는 2021년 11월 경기 안양 만안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냈다.

만안경찰서에서 사건을 넘겨받은 동작서는 태릉보육원을 비롯한 서울시 보육원과 노숙인 쉼터 등에 자료 협조를 요청하고 주민 자료, 법무부 자료, 건강보험 자료 등을 조회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에 경찰은 희재씨의 DNA를 채취해 아동권리보장원(보장원)에 보냈다. 지난해 12월12일 보장원으로부터 “유사한 사람이 있다”고 통보받은 경찰은 희란씨와 경인씨를 찾아 58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보냈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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