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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단독] 6000㎞ 끌려가 태평양전쟁 격전지서 '잊힌 유해', 80년 만에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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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조선인 1200명 숨진 '타라와 전투'
2019년 첫 신원 확인... 코로나로 봉환 연기
상반기 한국行... '태평양 강제동원' 첫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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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키리바시의 타라와섬에서 촬영된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 미국 태평양전쟁 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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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제 여든한 살입니다. 하루빨리 아버지를 선산에 모시고 싶어요.”

최금수씨는 한국에서 6,000㎞ 떨어진 태평양 섬나라 키리바시에서 발견된 ‘타라와 46번’ 유골 주인의 둘째 아들이다. 부친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고(故) 최병연씨. 팔순의 아들은 죽기 전에 유해로나마 아버지를 만나는 게 소원이다.

금수씨가 생후 50일을 막 넘긴 1942년, 24세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아내와 두 아들을 고국에 남겨둔 채 일본 해군 군속(군무원에 해당) 노무자로 끌려갔다. 가족은 그 뒤로 아버지 소식을 듣지 못했다. 행방조차 몰랐다. 금수씨는 1일 “사망 후 2, 3년쯤 지나 전사 통지를 받은 게 부친에 대한 기억의 끝”이라고 했다.

그렇게 반세기 넘게 아버지를 가슴에 묻고 살았다. 희망이 움튼 건 2018년. 키리바시 타라와섬에서 발견된 아시아계 유해와 유전자(DNA) 대조가 필요하다는 정부의 연락이 왔다. 곧장 혈액을 채취해 보냈고, 맘 졸이며 1년을 기다렸다. 2019년 마침내 타라와 46번 유골과 금수씨의 DNA가 99.999%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아버지를 찾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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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타라와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의 감시 아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부상당한 동료들을 살피고 있다. 미국 태평양전쟁 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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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당초 미국과 협의해 2020년 초 병연씨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하필 그해 지금까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감염병 유행이 시작됐다. 봉환 작업도 속절없이 미뤄졌다. 유골 신원 확인 당시 살아있던 형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결국 지난해 눈을 감았다.

다행히 지난해 하반기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잦아들면서 봉환 논의가 재개됐고, 이르면 올해 상반기 안에 병연씨 유해를 국내로 모신다는 정부 계획이 확정됐다. 유해봉환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현지에서 활동 중인 미 국방부 전쟁포로ㆍ실종자확인국(DPAA)이 하와이로 유해를 옮기면 정부가 현지로 모시러 가는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인은 모르는 '타라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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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바시 타라와섬 베티오의 해안가에 남아있는 일본군 해안포. 1943년 '타라와 전투'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티오(키리바시)=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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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씨 유해가 고국 땅을 밟으면 정부가 ‘태평양지역 강제동원’ 피해자를 봉환하는 첫 사례가 된다. 지금까지는 대개 일본 정부 등이 수습한 유해를 한국정부나 민간단체가 전달받는 형식이었고, 발굴 지역도 일본과 러시아 사할린 등에 국한됐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따르면 병연씨는 징용 1년 만인 1943년 11월, 타라와섬을 강제 점거한 일본군 4,800여 명과 상륙작전을 시도한 미군 3만5,000여 명이 벌인 ‘타라와 전투’ 때 희생됐다. 사흘간 치열한 전투 끝에 6,000명 넘는 전사자가 나왔다. 이때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만 1,200여 명이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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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바시 타라와섬 베티오에 위치한 타라와 전투 희생자 위령비. 베티오(키리바시)=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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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태평양 전쟁에서 희생된 한반도 출신 군인ㆍ군속은 최소 2만2,000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태평양 지역에서 돌아온 조선인 유해는 한 구도 없다. 일본 정부는 2016년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제2차 세계대전 전몰자 유골을 발굴하면 DNA 대조를 거쳐 유족에게 인도하고 있다. 단 DNA 검사 결과가 일본인으로 나와야 직접 수집·송환한다. 일제강점기 때 '자국민'에 포함시켰던 한반도 출신자는 유해 수습 대상에서 제외됐다. 우리 정부도 적극적으로 유해 발굴에 나선 적이 없다. 피해자들이 이름도 낯선 이역만리에서 쓸쓸하게 잊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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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바시 타라와섬 베티오에 위치한 타라와 전투 희생자 추모 불상. 철제 울타리를 넘어 가까이 가기 위해선 키리바시 관광청에 신청해야 한다. 베티오(키리바시)=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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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씨 유해도 미국 DPAA 덕에 발굴됐다. DPAA에서 일하던 한국계 제니 진(한국명 진주현) 박사가 “타라와에서 아시아계 유골이 대거 발견됐다”고 알려와 2018년 우리 정부가 과거사 조사 일환으로 현장 감식과 DNA 분석을 시작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신원이 확인된 건 아직 병연씨 한 명뿐이다.

여든 넘은 아들 "하루빨리 선산에 모시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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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유골함.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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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1일 한국일보가 찾은 타라와섬에는 지금도 전쟁의 상흔은 뚜렷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이는 없었다. 희생자들을 기리는 두 개의 불상도 전부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불상을 관리하는 키리바시 관광청 직원은 “6년 전 이 일을 시작했는데, 이제껏 본 한국인 추모객은 지난해 주피지 한국 대사 일행 외에 기자가 처음”이라고 했다. 미국인과 일본인 추모객은 종종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정부는 병연씨 유해 봉환을 계기로 태평양 지역에 있는 조선인 희생자 발굴 작업에 좀 더 속도를 낼 방침이다. 행안부 관계자는 “타라와에서 발견된 아시아계 유해 500여 구의 신원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며 “일본 측과 협조해 DNA 감식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베티오(키리바시)= 장수현 기자 jangsu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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