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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많은 말’로 사고 치는 윤 대통령…준비된 언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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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466

준비되지 않은 다변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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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월27일 통일부·행정안전부·보훈처·인사혁신처 새해 업무보고에서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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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은 대개 말을 잘합니다. 정치는 거의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권한 행사도 대부분 말로 이뤄집니다. 국가의 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말은 곧바로 국가와 행정부의 지침이 됩니다.

윤여준 전 장관은 2011년 <대통령의 자격>이라는 책에서 ‘절제되고 기품 있는 언어 구사 능력’을 대통령의 첫번째 자질과 능력으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언어 구사의 문제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바도 있지만, 언어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체인 것이다. 하물며 국가 지도자 특히 대통령의 경우, 국가의 최고 행위자다운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달변일 필요는 없으며, 특히 현학적인 전문용어나 생경한 관념어를 남발하거나 아니면 감성을 자극하는 현란한 어법으로 대중을 선동하려는 것은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쌓아온 지혜의 결정체인 인문학에 대한 천착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녹여낸 절제되고 기품 있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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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없는 마무리 발언 ‘28분’


윤석열 대통령은 말이 많습니다. 검사 때부터 형성된 습관입니다. 검사 시절 부하 검사들이나 기자들과 2시간 동안 식사를 하면 1시간50분 동안 혼자 떠들었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된 지금도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하면 누구보다도 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식사 자리나 술자리에서 즐겁게 대화하고 떠드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은 여러가지 곤란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초에 각 부처 업무보고를 받았습니다. <한겨레> 배지현 기자가 “대통령이 얼마나 아는 게 많으면 즉흥 발언을 20분이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발언, 불필요한 발언, 전 정부를 비난하는 발언을 너무 많이 했다는 우려를 담은 내용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대통령실 일부 인사들의 변명에서 따온 것입니다. 기사는 엄청나게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업무보고 마무리 발언은 짧게는 9분에서 길게는 28분이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사전에 준비한 원고를 보고 한 것이 아니라 즉석 발언이었습니다.

대통령도 사람입니다. 국정의 모든 것을 다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사전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말을 길게 하다 보면 실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거의 그대로 다 공개했습니다. 자신감인지 만용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역대 대통령도 윤석열 대통령 못지않게 다변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대통령이 되면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정보와 권한이 많아지면 말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신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은 공식 석상에서 하는 발언을 극도로 조심했습니다. 대통령의 공식 발언은 국가와 행정부를 대표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실 행정관,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했던 강원국씨가 2014년에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을 냈습니다. 책에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의 연설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참여정부 연설비서관실 김철휘 선임행정관의 증언을 정리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부분만 간추려 전해드리겠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말 그대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연설을 했다. 간혹 원고에 없는 내용으로 특유의 유머 감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설문 작성에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연설문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어투도 힘 있는 군인 연설 투다. ‘본인은’이란 특유의 억양이 흉내 내기의 단골 소재가 될 만큼 권위주의적이고 훈시하는 스타일의 연설을 했다.”
노태우 대통령

“‘나 이 사람 믿어주세요’라는 말이 대변하듯이 설득호소형의 연설을 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조곤조곤 얘기하듯 친근하게 다가가는 연설을 좋아했다.”

“연설문이 만연체, 화려체다. 감동적이고 멋있는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연설문 자체의 완성도만 보면 노 대통령 연설문이 가장 훌륭했다고 할 정도로 글이 유려하다.”
김영삼 대통령

“철저하게 메시지 중심의 연설을 했다. 김 대통령은 똑 떨어지는 명확한 표현을 통해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윤여준이란 걸출한 인물이 연설문을 담당했다. 동아일보 출신인 윤 수석은 노태우 정부의 이수정 수석에 버금갈 만큼 글을 잘 썼다. 대통령도 그의 글을 신뢰했다. 윤 수석이 작성한 연설문을 세 번 정도 소리 내어 읽어본 후, ‘좋습니다. 이대로 갑시다.’ 이게 전부였다.”

“김 대통령은 ‘정치 9단’이란 별명답게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다. 연설문을 보고하면 굵은 사인펜으로 한두 자 덧붙여서 내려왔다. 그런데 다음 날 조간신문 헤드라인은 어김없이 대통령이 추가한 내용으로 뽑혔다. 대통령이 직접 추가한 내용을 기자들이 알 턱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김 대통령은 언론이 어디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제목으로 뽑아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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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남는 대통령의 말과 글


강원국씨가 쓴 책의 내용은 주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글에 관한 것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인이지만 자신의 말과 글에 대해 철학자 수준의 깊은 성찰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연설에 대한 견해를 직접 정리해놓았습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설을 했다. 한때는 정치가 곧 연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원고를 작성했다. 중요한 연설문은 산통이 대단했다. 호텔 방을 전전하며 구상하고 수없이 다듬었다.”

“연설문은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문장은 명료하고 예는 쉽게 들었다. 미문은 경계했고 오해 소지가 있는 문구는 배격했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연설 담당 비서들이 초안을 잡아 왔다. 하지만 대부분 내가 마무리 손질을 했다. 그들도 나름의 최선을 다해서 가져오지만 내 뜻을 정확히 읽지 못하거나 논점이 흐린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한밤중이나 휴식 시간에도 원고를 썼다.”

“무슨 일이든 내가 잘 알아야 남을 설득할 수 있었다. 연설문을 작성하는 것은 일종의 공부였고, 현안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연설문은 진실해야 했다. 말의 유희나 문장의 기교에 빠지면 나의 가치와 철학, 그리고 의지가 없어지고 만다. 나는 내 연설문을 역사에 남긴다는 생각으로 썼다. 그래서 늘 진지했다.”

어떻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진정성이 느껴지십니까?

말과 글에 대한 집착은 노무현 대통령도 김대중 대통령 못지않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 대변인, 부속실장, 연설기획비서관을 지낸 윤태영씨가 2014년 <기록>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언어를 사고했다. 카피를 연구했다. 표현을 궁리했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언제나 그랬다. 식사를 할 때도 느닷없이 대구(對句)로 된 문장을 이야기하며 나에게 느낌을 묻곤 했다.”

“고유의 독자적인 언어와 논리 체계가 있는 것이 그의 연설이었다. 누가 대신하여 쓸 수 있는 연설이 아니었다. 그의 연설은 90% 이상을 자신이 구술했다. 그 구술을 바탕으로 연설팀이 작성한 원고를 최종적으로 그가 다시 가필·첨삭하여 완성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장 즉흥 연설, 이른바 애드리브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강원국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애드리브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노 대통령 입장에서 애드리브는 상대에 대한 추임새이고 배려였다. 그에게는 원고를 줄줄 읽는 것이 청중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눈을 맞추고 그들과 교감하며 말하는 것이 최소한의 성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결코 가벼워서가 아니다. 권위주의적, 제왕적 대통령의 모습이 싫었을 뿐이다.”

“노 대통령은 언젠가 이런 얘기를 했다. ‘자네들 내가 즉흥적으로 얘기하는 것 같지? 물론 그럴 때도 있지. 그러나 대부분은 자네들 연설문을 보고 이 대목 정도에서 이런 얘기를 추가해야겠구나 생각을 한다네.’”

아시겠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의 애드리브는 미리 준비한 연설문을 보완하기 위한 ‘준비된 발언’이었던 것입니다. 각 부처 업무보고에서 준비한 원고 없이 20분씩 마무리 발언을 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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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말’ 우려 새겨들어야


마무리하겠습니다. 대통령은 절제되고 기품 있는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윤여준 전 장관의 제안에 저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특히 말로 자주 사고를 치는 윤석열 대통령이 윤여준 전 장관의 조언을 잘 새겨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공석이든 사석이든 말을 좀 줄이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발언은 사전에 철저히 준비해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은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은 대통령에게도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말과 글이 바로 대한민국의 품격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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