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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들판 가득 웅성웅성 두런두런’…말의 음악적 요소를 강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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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삼식 어린이 희곡 출간 인터뷰

동아일보

최근 어린이용 희곡 그림책 ‘훨훨 올라간다’를 낸 국내 대표적 극작가 배삼식(53)이 1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을 배경으로 섰다. 장승윤기자 tomat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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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년 전 ‘어린이용 희곡을 써달라’는 출판사의 제안에 손사래를 쳤어요. 써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자 노래 부르듯 즐거워 며칠 만에 끝을 봤습니다.”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광화문사옥에서 1일 만난 극작가 배삼식(53)은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지난달 출간된 그의 희곡 그림책 ‘훨훨 올라간다(비룡소)’는 25년간 번역극과 창작극, 마당놀이 등 영역을 넘나들며 각종 희곡상을 휩쓴 그가 처음으로 펴낸 어린이용 희곡이다. “초장부터 아이들이 노래하며 노는 극을 구상했다”는 그의 말은 때론 세찬 여울처럼, 때론 적막한 호수처럼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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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배삼식의 어린이용 희곡 그림책 ‘훨훨 올라간다’의 한 페이지. 그림은 노성빈이 그렸다. 비룡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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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훨 올라간다’는 전북 진안의 마이산 설화를 재창작한 동화다. 먼 옛날 큰 죄를 지은 하늘나라의 부부가 이 땅으로 추방돼 오랜 세월 마이산으로 살았다. 다시 하늘로 돌아가려던 순간 마을의 아가씨에게 목격돼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단 이야기다. 배 작가는 이를 ‘태초의 남매’인 송동이와 백단이가 하늘로 떠나려는 산을 붙잡는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책의 기원은 그의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고향인 전주에서 주말이면 시외버스를 타고 마이산에 올라 숨통을 틔웠다. 그즈음 처음 연극을 접했다. 지역 대학교 동아리가 공연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것. 그는 “비록 무대장치는 허술했지만 그 공백을 상상으로 메우며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며 “연극과 희곡은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한 장르인 만큼 아이들이 일찍, 쉽게 접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말했다.

국내를 대표하는 극작가지만 어린이용 책은 도전이었다. 쉽고 분명하면서도 울림을 잃지 않아야 하기 때문. 그는 “좋은 어린이 책은 시적(詩的)이어야 하기에 까다로웠다”며 “북유럽 작가인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등의 동화책을 읽으며 존경을 느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개의 단어를 품은 단 하나의 단어’를 고르는 배삼식의 스타일은 간결하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이용 책을 쓸 때 더욱 빛을 발했다. 책 속엔 “나무들은 푸른 이불 잠든 산을 덮어주네” 등 직관적이면서도 아름답고,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함의를 품은 문장들로 가득하다. 그는 “산도, 거기 사는 동물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며 “환경, 역사 등 깊은 주제를 ‘아이들은 이해 못 한다’며 모조리 표백하기보단 아이들이 넌지시 감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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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배삼식의 어린이용 희곡 그림책 ‘훨훨 올라간다’의 한 페이지. 그림은 노성빈이 그렸다. 비룡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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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각자 역할을 맡아 희곡을 소리 내 읽으며 세상과 마주하길 바라는 마음도 컸다. 그에게 역할놀이란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은 말의 음악적 요소를 강조해 노래극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들판 가득 웅성웅성 수런수런 두런두런” 등 이전 작품과 비교해 의성어·의태어가 다채롭게 쓰였다. 책 뒤편에는 아이들이 실제 연극을 할 때 쓸 수 있는 종이인형 부록이 실려 있고, 배우들이 실감나게 읽어주는 목소리 연기도 QR코드로 담겨 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술래잡기, 말뚝박기 등 장난감은 ‘서로의 몸’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부대끼는 경험이 적습니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다른 존재를 흉내 내면서 자기 자신을 인식해요. 위험한 발상일 수 있지만 문학이라는 안전장치 속에서 (아이들이) 인생의 잔혹동화를 미리 경험하고 단단해질 수 있게 도와줘야 합니다”.

앞으로는 오페라나 노래 가사 등 음악적 글쓰기에 더욱 집중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물결처럼 출렁이는 판소리 사설(辭說)을 읽거나 술집 등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대화를 들으며 생생한 단어를 꾸준히 수집한다”며 “살아있는 우리말 보물창고”라고 웃었다. 이번 작품은 작곡가와 협의를 거쳐 1년 후 노래극으로 무대에 올린다는 계획이다.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기념 창작 오페라도 이르면 내년 선보일 예정이다.

“아이들이 능동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무대를 꾸리고 싶어요. 산간지역을 포함한 전국 학교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지윤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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