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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미-중, 발리에서 한 약속 깨지나…‘풍선 격추’ 수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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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4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서프사이드비치 근처 상공에서 미사일에 맞은 중국발 기구가 추락하는 가운데 작전에 동원된 전투기가 날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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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기구의 영공 침범이 미국 국무장관의 방중 취소와 미 공군의 격추라는 ‘실력 행사’로 이어지며 미-중 관계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됐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지난해 11월 첫 대면 정상회담에서 “경쟁이 충돌로 발전하면 안 된다”며 고위급 교류 재개에 합의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두 대국이 ‘우발적 갈등’을 관리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깊어지고 있다.

미국 국방부는 4일 오후(현지시각)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해안을 통과해 대서양 상공으로 10㎞쯤 이동한 중국의 ‘정찰 기구’(spy balloon)를 F-22 전투기 미사일로 격추했다고 밝혔다. 미국 국방부는 중부 내륙인 몬태나주 상공에 있을 때는 잔해가 지상에 떨어져 피해를 입힐 수 있다며 요격을 미룬 이 기구가 영토를 벗어나자마자 파괴에 나섰다. 미군은 잔해를 수거해 기구의 역할 등을 조사하게 된다. 격추에 성공한 뒤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은 이 작전은 “우리 주권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침해”에 대응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 바이든 대통령이 가능한 한 빨리 이를 격추하라고 지시했다며 “성공적으로 격추한 조종사를 칭찬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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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은 이미 안보와 첨단 기술 등에서 전방위적인 ‘전략 경쟁’에 돌입한 두 대국의 관계가 우발적 사건으로 언제든 쉽게 악화될 수 있음을 일깨워줬다. 미국 국방부는 2일 공식 발표를 통해 애초 이 기구가 정찰용이라면서도, 중국의 저위도 정찰위성이 더 성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별다른 군사적 위협은 안 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3일 “주권 침해”를 “용납할 수 없다”며 방중을 무기한 연기했고, 4일 전투기를 띄워 격추에 나섰다. 기구를 발견했다는 공식 발표가 나온 시점(2일)부터 격추(4일)까지 사흘간 미국 행정부·언론·정치권이 ‘본토 침입’을 감행한 중국 기구 문제로 떠들썩했다.

중국의 대응도 비슷했다. 3일 밤 블링컨 장관으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은 중국 ‘외교 사령탑’인 왕이 정치국원 겸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은 두 나라가 “의외의 상황에 대면하게 되더라도 통제력을 유지하고 적시의 의사소통을 통해 오판을 피하고 의견 차이를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이 기구를 격추시키자 중국 외교부는 5일(중국 시각) “필요한 추가 대응을 할 권리를 보유할 것”이라고 보복을 예고했다.

미국의 대응이 갈수록 강경해진 데는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바이든 대통령을 유약하다고 비난한 것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 매콜 하원 외교위원장은 행정부의 책임을 묻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그 때문인지 바이든 대통령은 4일 오후 기자들과 만나 자신이 “수요일(1일)에 기구에 대해 (공식 발표 전) 브리핑을 받았고, 가능한 한 빨리 격추하라고 국방부에 지시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미-중 간 상호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이어진 것은 기구의 정체를 둘러싼 ‘진실 공방’이었다. 중국 외교부는 거듭 기상 연구에 주로 쓰는 민간 기구가 통제력을 잃고 편서풍에 밀려 이동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오스틴 장관은 격추된 기구는 중국 정부가 “전략적 장소들에 대한 정찰 목적”으로 띄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국방부는 이 기구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격납고 150개가 있는 몬태나주 맘스트롬 공군기지 상공에 머무른 것도 이런 판단의 근거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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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안보 관리들은 중국이 기구·드론 등을 미국 안팎의 미군 기지와 다른 나라 시설 정찰에 써왔으며, 전에도 이런 식으로 미국 영공을 침범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번처럼 보통 18㎞ 상공에서 체류하는 중국 기구는 카메라, 통신장비, 태양광 전지판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달에도 네바다주 해군 항공기지와 일본 이와쿠니의 미국 해병대 항공기지에 대한 첨단기술을 이용한 공중정찰 시도를 담은 비공개 보고서가 의회에 제출됐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보고서가 정찰 주체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미군 관계자들은 미확인비행물체(UFO)로 분류되는 사례들 중 적성국 공중정찰 활동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국방부는 3일에는 다른 중국발 기구가 중남미 상공에서 이동 중이라고 밝혔다.

애초 유감의 뜻을 밝혔던 중국도 미국의 강경 대응이 이어지자 태도를 바꿔 강하게 반발했다. 중국 외교부는 기구 격추 뒤인 5일 성명에서 “민간용 무인비행선을 무력으로 공격한 것에 강한 불만과 항의를 표명한다”며 “미국이 무력을 동원한 것은 명백한 과잉 대응으로, 국제관례를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 기구가 불가항력으로 미국에 도달했다며 “선처”를 요구했는데도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며 자국으로서는 “필요한 추가 대응”을 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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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해 11월14일(현지시각)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발리/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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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태는 안 그래도 위태롭게 유지돼온 미-중 관계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올 수밖에 없게 됐다. 블링컨 장관의 베이징 방문이 무기한 연기된 게 이번 사건의 즉각적이고 가장 큰 파장이다. 지난해 11월 미·중 정상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만나 ‘양국 간 소통 채널 회복’에 합의했다. 그런 의미에서 블링컨 장관의 방중은 산적한 글로벌 현안에 협력해야 하는 양국 간 긴장 완화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모았다. 미 국무장관의 마지막 방중이 2018년 10월인 점을 고려하면 그의 이번 방문의 의미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블링컨 장관은 자신의 방문 직전에 중국 기구가 미국 영공을 침범한 것은 “더욱 무책임하다”며 5~6일로 예측됐던 일정을 전격 취소했다. 중국이 애초 이번 사태에 유감의 뜻을 밝히며, 원만한 문제 해결을 원했던 만큼 어렵게 만들어진 갈등 관리의 모멘텀을 이어가기 힘들게 됐다.

미-중 관계는 최근에도 미국의 첨단 반도체와 반도체 제조장비에 대한 대중 수출 통제 강화, 미군의 필리핀 군사기지 4곳 사용권 추가 확보, 중국군의 대만 주변 무력시위 등 갈등을 높이는 쪽으로만 흘러왔다. 이런 가운데 <월스트리트 저널>은 4일 중국 방위산업체 등이 미국의 제재를 받는 러시아 방위산업체들에 전투기 부품을 팔고, 군사용으로도 쓸 수 있는 수만개의 이중용도 제품도 중국에서 러시아로 넘어간 사실이 세관 기록을 통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가 이를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지원으로 해석할 경우 갈등의 파고는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베이징/이본영 최현준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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