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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세상에 이런 스타트업 다시 나오기 힘들죠" 에미상 수상 스타트업 창업한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아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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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써즈 공동창업해 국내 유일의 영상 검색 기술 개발
KT 대표 바뀌며 적폐로 몰려 공중분해 결정
"누가 사겠냐" KT 냉소 속에 매각자 찾아 나서

"이렇게 기술력과 팀워크가 뛰어난 신생기업(스타트업)은 다시 나오기 힘들어요."

벤처투자업체 소프트뱅크벤처스 아시아의 이준표 대표가 과거 공동 창업했던 엔써즈에 대해 내린 평가다. 엔써즈는 'TV판 아카데미'로 통하는 미국 에미상의 올해 기술부문 수상자로 결정돼 4월 16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다.(한국일보 1월 27일 보도) 토종 스타트업이 에미상을 받는 것은 처음이다.

엔써즈는 탁월한 자동 영상 인식(ACR) 기술을 갖고 있는 업체로 꼽힌다. ACR은 시청자가 현재 보고 있는 TV 프로그램을 자동 파악해 개인 취향에 맞는 맞춤형 광고 및 시청률 조사 등이 가능한 기술이다.

그러나 이 업체는 앞선 기술에도 불구하고 KT에 인수됐다가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재차 미국에 팔린 비운의 기업이기도 하다. 창업부터 매각까지 전 과정을 함께한 이 대표를 만나 알려지지 않았던 우여곡절을 들어봤다.
한국일보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는 올해 에미상 기술부문상을 받는 스타트업 엔써즈의 공동창업자이다. 그는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의 소개로 김길연 전 엔써즈 대표를 만나 2007년 엔써즈를 함께 창업했다. 배우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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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이 맺어 준 인연


엔써즈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검색 서비스 '첫눈'과 세계적 게임 '배틀 그라운드'로 유명한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이다. "장 의장이 저를 공동 창업자로 김길연 전 엔써즈 대표에게 추천했어요. 장 의장은 뛰어난 회사를 만드는데 필요한 사람들을 엮어주는 안목이 탁월했어요. 즉 팀 구성 능력이 뛰어났죠."

당시 카이스트 학생이었던 이 대표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영상재생기 '곰플레이어'를 만든 1세대 벤처기업인 배인식 키클롭스 대표가 창업한 그래텍에서 일하고 있었다. 배 대표는 1987년 전국대학컴퓨터연합동아리 유니코사(UNICOSA)를 만들어 숱한 벤처 기업인들을 배출한 장본인으로, 후배인 장 의장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결국 이 대표는 배인식 장병규로 연결되는 인연 덕분에 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2007년 엔써즈의 공동 창업자가 됐다.

"국내 처음이자 마지막" 유일의 영상 검색 기술 개발


엔써즈를 유명하게 만든 영상인식기술은 음성인식에서 출발했다. 김 전 대표가 개발한 '핑거 프린팅'이라는 음성인식기술을 영상에 적용하면서 세계 최초의 영상 검색 서비스 '엔써미'가 탄생했다. "핑거 프린팅 기술은 주파수 파형을 잘개 쪼개 음성인지 영상인지 알아내는 기술이었죠. 이를 우리는 오디오 DNA와 비디오 DNA라고 불렀어요."

이들이 내놓은 엔써미는 구글의 동영상 검색 기술보다 뛰어났다. 특정 검색어를 입력하면 제목에 단어가 들어 있지 않아도 검색어에 해당하는 영상을 찾아준다. '스마트폰'을 검색창에 입력하면 제목에 스마트폰이 없어도 스마트폰이 나오는 영상을 모두 찾아주는 식이다. 즉 글자가 아닌 그림을 알아보는 혁신적 기술이었다. "국내에서 영상을 검색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곳은 엔써즈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지금도 없어요."

당시 영상 콘텐츠를 다룬 업체들은 이 기술에 환호했다. 구글은 인수까지 검토할 정도로 큰 관심을 가졌다. "구글의 인수 제안도 매력적이었지만 끝까지 우리끼리 해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네이버, 다음, 엔씨소프트, 국내 대부분의 웹하드 서비스 업체들이 모두 고객이 됐죠. 이 기술을 적용한 업체들은 영상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이용자들이 늘었어요. 덕분에 엔써즈도 돈을 잘 벌었죠."

심지어 엔써즈는 고인이 된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가 참여한 '올 싱스 디지털'(All Things digital)이라는 미국 IT 기술 발표회에도 등장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010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스티브 잡스 대담에 이어 엔써즈가 무대에 올라가 이미지를 누르면 동영상이 재생되는 '이미지 투 플레이' 기술을 소개했어요. 시연하는 순간 청중들이 일제히 '와' 소리와 함께 감탄하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한국일보

김길연 전 엔써즈 대표가 스마트폰으로 이미지를 비추면 자동으로 해당 영상을 찾아 재생해 주는 기술을 시연하고 있다. 김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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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눈에 띄다


구글 못지않게 엔써즈 기술에 주목한 곳은 삼성전자였다. "당시 삼성전자는 사람들이 TV로 현재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있으면 또 다른 사업 기회가 생길 것으로 봤어요."

삼성전자는 엔써즈 기술을 TV에 넣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 에미상을 받게 된 ACR 기술을 개발해 삼성전자의 스마트TV에 탑재했다. 하지만 삼성 이외 다른 업체들도 ACR 기술을 원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언제 시장이 열릴지 모르니 몇 년 동안 적자를 보며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기술 개발을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어요."

그때 KT가 기술의 진가를 알아보고 구원자로 나섰다. 2011년 말 엔써즈 인수를 결정한 것이다. KT는 경영권 확보와 개발비 등 약 400억 원을 엔써즈에 투자했다. 이석채 전 KT 회장은 2012년 연임 기자간담회에서 김길연 엔써즈 대표를 소개하며 "KT의 미래"라고 치켜세웠다. "KT는 몇 년 동안 적자를 봐도 상관없으니 계속 기술을 개발하라며 전폭적으로 밀어줬어요."

KT 회장 바뀌며 적폐로 몰려 공중분해 결정


그런데 2014년 황창규 KT 전 회장이 새로 취임하며 분위기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KT 경영진이 바뀌면서 졸지에 청산해야 할 적폐로 몰렸죠. 계속 기술 개발을 하느라 3년간 적자를 냈는데 투자 시점의 얘기와 달리 돈이 되지 않는다며 접기로 했어요."

마침 3년간 공들여 개발한 이용자 대상(B2C) 서비스 '이미디오'가 완성돼 서비스 직전이어서 안타까웠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서비스를 시작했을 겁니다."

놀랍게도 KT에서 내린 결정은 엔써즈의 공중분해였다. "KT는 엔써즈 인력을 쪼개서 각 사업부로 보내기로 했어요."

엔써즈 매각은 KT 시나리오에 없었다. "KT에서 적자 기업을 누가 사겠냐며 매각 시도를 아예 하지 않았죠."
한국일보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아시아 대표가 서울 신논현역 인근 사무실에서 엔써즈 매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엔써즈를 인수한 KT가 엔써즈의 공중분해를 결정한 뒤 이 대표가 직접 엔써즈의 인수자를 찾아다녔다. 배우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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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와 문전박대' 인수자 찾으려 1년간 수십 개 업체 방문


그래서 엔써즈 부대표였던 이 대표가 직접 인수 대상자를 찾아 나섰다. "청춘의 한때를 바친 기업이 사라지게 둘 수 없었어요. 최대한 지키고 싶었죠. 그게 창업자의 마지막 책임이라고 생각했어요."

인수자를 찾겠다는 이 대표의 말에 KT 관계자는 코웃음을 쳤다. "팔 수 있으면 팔아보라며 냉소적 반응이었어요."

그때부터 1년간 이 대표는 미국과 유럽에서 살다시피 했다. 일면식도 없는 기업 수십 군데를 무작정 찾아갔다. 문전박대도 부지기수로 당했다. "매각 대상을 찾던 1년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어요. 회사 소개서를 들고 각종 전시회부터 기업 사무실까지 1년 내내 찾아다녔죠."

그러다가 미국의 서너 군데 업체가 관심을 가졌다. 그중 엔써즈를 인수한 그레이스노트가 있었다. 미국 일간지 시카고트리뷴을 발행하는 트리뷴미디어 그룹 산하의 그레이스노트는 음성인식기술 업체여서 엔써즈 기술의 접목을 원했다. "그레이스노트 대표는 이렇게 뛰어난 기술을 왜 파냐며 의아해했어요.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자 적극 인수하겠다고 나섰죠."

당시 그레이스노트에서 제안한 인수 가격은 3,000만 달러, 당시 우리 돈으로 300억 원이 웃도는 액수다. KT는 이 대표가 제시한 그레이스노트의 인수 의향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KT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죠. 어떻게 이 액수를 받았냐며 놀랐어요. KT는 한 푼도 받지 못할 것으로 보고 청산하려고 했는데 300억 원을 받게 된 셈이죠."

그렇게 이 대표는 2015년 KT를 대신해 공동 창업한 회사의 매각 작업까지 마무리했다. 매각 작업이 마무리되는 날 사직서를 냈다. "돌이켜보면 KT에 경영권을 넘기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개발비가 필요해 KT 인수 제의를 받아들였는데, 우리가 계속 끌고 갔으면 제2의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회사를 만들 수도 있었겠죠."

회사 떠나던 날, 지금도 잊지 못해


지금도 이 대표는 엔써즈를 떠나던 날을 잊지 못한다. "미국 기업에 팔리고 나서 직원들이 울던 모습이 눈에 선해요. 직원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술 개발이 좋아서 주말과 밤도 없이 주 7일 회사에서 먹고 자며 일했어요. 그만큼 애정과 열정을 쏟았고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컸는데 이런 것들이 사라지니 견디기 힘들었죠."

이 대표는 엔써즈를 그만두고 2015년 소프트뱅크벤처스 아시아로 옮겼다. 투자 심사역으로 활동하던 그는 2018년 30대 대표가 됐다. 소프트뱅크에서 승승장구한 이면에는 엔써즈 경험이 크게 도움 됐다. "엔써즈 시절 만난 인연들이 투자에 큰 도움이 됐어요. 소프트뱅크벤처스 아시아가 투자한 스타트업 중 가장 잘된 곳이 세계 1위 영상자막 업체 아이유노인데, 엔써즈 시절 기술 협력을 위해 만난 곳입니다. 하이퍼커넥트도 엔써즈 시절 알게 된 회사죠."

김길연 전 엔써즈 대표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버뮤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마일로스를 2017년 창업해 운영하고 있다. 그는 과거 창업 경험을 살려 부동산 기술, 공동구매 서비스 등 여러 스타트업에 투자도 했다.

이 대표는 엔써즈 일을 돌아보며 "스타트업 환경은 과거보다 지금이 낫다"고 강조했다. "엔써즈 창업 당시 미국 리먼브라더스 상태로 전 세계 경기가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투자받기 힘들었죠. 소프트뱅크는 올해까지 투자 환경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사업 계획을 진행하고 있어요. 지금은 생존이 키워드죠. 중요한 것은 투자 환경 못지않게 이용자에게 가치를 줄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며 버티는 것이죠. 좋은 팀과 좋은 제품을 갖고 있다면 투자 환경이 좋지 않아도 투자받을 수 있어요."

최연진 IT전문기자 wolfpa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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