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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제시카법’만으로는 괴물들을 막지 못한다 [오늘과 내일/장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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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성범죄자 거주 제한으론 재범 방지에 한계

보호수용제 등 실효성 높은 방안 적극 추진해야

동아일보

장택동 논설위원


이른 아침 울리는 알람을 꺼주기 위해 아버지는 딸의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홉 살 제시카는 방에 없었다. 잠깐 밖에 나갔으려니 생각했지만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해 대대적인 수색이 진행됐다. 2005년 2월 24일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적한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다.

제시카는 실종 20여 일 만에 집 근처 숲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제시카를 납치해 성폭행한 뒤 산 채로 묻은 범인은 40대 이웃 주민이었다. 그는 이전에도 미성년자 성추행으로 2차례 체포된 전력이 있었지만 당시 성범죄자 관리 시스템은 허술했다. 여론의 분노에 아동 성범죄자는 학교나 공원에서 2000피트(약 600m) 안에 살지 못하게 하는 등 내용의 ‘제시카법’이 40여 개 주에서 제정됐다.

법무부는 올해 중점 과제 중 하나로 한국판 제시카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아동 성범죄자, 상습적 성범죄자 같은 ‘괴물’들이 출소 이후 학교, 유치원, 어린이집에서 최대 500m 이내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부모와 아이들의 걱정을 조금 덜어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 해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자발찌를 착용한 성범죄자의 재범 장소를 보면 주거지 500m 이내가 절반 정도였고, 나머지는 더 먼 곳에서 발생했다. 미국에서는 거주 제한이 성범죄 재범 방지에 큰 효과가 없다는 연구 결과도 나온다.

보다 실효적인 수단들이 있다. 아동 성범죄자에 대한 형량을 높이는 것 외에도 출소 이후 별도의 시설에 격리해서 지내도록 하는 보호수용제를 고려할 수 있다. 대상을 엄격하게 선별하고 시설의 편의성을 향상시킨다는 점에서 2005년 폐지된 보호감호제와 차이가 있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병적으로 아동에게 집착하는 성범죄자는 완치될 때까지 기간 제한 없이 입원시키는 방법도 있다.

한국에서도 2014년 법무부가 보호수용제 도입을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헌법상 거주·이전의 자유를 침해하고 이중처벌 금지에 위배된다는 반론에 부딪혀 무산됐다. 현재 추진 중인 제시카법 제정과 치료감호제 강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는 성범죄자의 인권과 잠재적 피해자가 보호받을 권리 사이에서 충돌이 빚어질 때 어느 쪽에 무게를 둘 것인가의 문제다. 성범죄자도 헌법상 권리는 보장받아야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헌법에는 공공복리 등을 위해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범죄의 특수성과 피해의 정도를 감안해서 따져봐야 할 사안이다.

성폭력은 영혼을 파괴하는 범죄다. 어린 나이에 끔찍한 일을 겪으면 그 상처가 더 깊다. 피해자들은 평생 동안 고통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그래서 아동 성범죄를 ‘영혼 살인’이라고 부른다. 서방 국가들의 인권 의식이 낮거나 형사사법의 수준이 떨어져서 아동 성범죄자를 엄벌하고 출소 이후에도 격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이 성범죄로부터 안전하게 생활할 권리는 법전에 적을 필요조차 없을 만큼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그만큼 국가는 강력한 의무를 지고 있다. 정부와 국회가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추진해야 할 일이다. 기준을 엄격하게 정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논의는 필요하다. 하지만 한 명의 피해자라도 더 줄이기 위해서는 속도가 중요하다. 올해에만 1500명이 넘는 미성년 대상 성범죄자가 출소해 누군가의 옆집에 살게 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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