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위한 '제3자 변제' 방안을 최종 발표했다. 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 등 일본 기업의 법적 배상 책임을 인정한 2018년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4년만이다. 정부는 "대승적 결단이자 우리 주도의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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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이 판결금 지급"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지원재단)이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지원 및 피해 구제의 일환으로 2018년 대법원의 3건의 확정판결 원고에게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한다"고 밝혔다. 재원에 대해선 "민간의 자발적 기여 등을 통해 마련하고, 향후 재단의 목적 사업과 관련한 가용 재원을 더욱 확충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법적 배상 책임이 있는 일본 기업 대신 지원재단이 변제 주체로 나서서, 한·일 기업이 자발적으로 낸 자금을 모아 피해자들에게 법적 배상금 액수에 준하는 판결금을 주겠다는 의미다. 포스코를 비롯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경제협력자금을 받았던 16개 국내 기업이 우선적으로 재단에 자금을 출연할 예정이다. 2018년 대법원 판결 이후 일본 기업의 배상 거부로 지급이 미뤄져 발생한 이자를 합치면 피해자에게 전달될 돈은 1인당 2억여원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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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이날 별도의 설명 자료를 통해 최종 해법에 대해 "대한민국의 높아진 국격과 국력에 걸맞은 대승적 결단으로서, 우리 주도의 해결책"이라며 "고령의 피해자를 위해 정부가 책임감을 갖고, 과거사로 인한 우리 국민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보듬는 조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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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기업 참여는 미지수
다만 한·일 외교 당국이 협상 막판까지 줄다리기를 벌였던 일본 피고 기업의 기금 참여에 대해선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일부 피해자 측은 그간 "여타 일본 기업이 아닌 피고 기업이 직접 지원재단에 1엔이라도 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대신 피고 기업은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일본의 게이단렌(經團連) 등 양국 경제계가 공동 조성하는 '미래청년기금'(가칭)에 참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이는 유학생 장학금, 청년 교류 등을 위한 기금으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기업의 참여를 결국 담보하지 못한 해법이라는 지적에 대해 박 장관은 이날 "정부의 대승적인 결단에 대해서 일본 측이 일본 정부의 포괄적인 사죄 그리고 일본 기업의 자발적인 기여로 호응해 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유하자면 물컵이 절반 이상은 찼는데, 앞으로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 물컵이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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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한미-한미일 구상
대통령실과 정부는 이날 강제징용 해법 발표를 모멘텀으로 이달 중순 한·일 정상회담 → 4월 한·미 정상회담 →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중 한·미·일 정상회담 등 연쇄 정상회담 일정을 짜고 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피해자 측과 강제징용 문제를 수년간 바라보던 사람들에게는 일본의 호응 조치에 대해 아쉬운 점이 많겠지만, 한국 외교 안보 지형의 큰 그림을 보고 정부가 전략적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협상을 더 끌더라도 한국이 원하는 바를 100% 관철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에서 국제 정세 상 지금이 해법 발표의 적기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도 "일본 피고 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 조치(현금화)가 목전이고 일본의 원칙적 입장이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미·일 협력이 절실해진 국제 정세까지 겹쳤다"며 "이런 3중고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늦지 않게 결단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상이 6일 한국의 강제징용 해법 발표 후 개최한 약식 기자회견에서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 계승 입장을 밝히는 모습. AP Photo/Eugene Hoshiko.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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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권 상정 안 해"
한편 정부는 현재 일본 기업을 상대로 진행 중인 여러 소송을 통해 최종 승소하는 강제징용 피해자가 추가로 나올 경우 제3자 변제 방식을 마찬가지로 적용할 계획이다. 이날 정부가 발표한 해법의 우선 적용 대상자는 2018년 대법원 판결로 최종 승소한 피해자 15명(원고 기준 14명)이다.
여기에 더해 현재 소송을 진행 중인 피해자와 유족은 1000여명으로 추산된다. 박 장관은 이날 "재단은 현재 계류 중인 강제징용 관련 여타 소송이 원고 승소로 확정될 경우, 동 판결금 및 지연이자 역시 원고분에게 지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원재단이 일본 기업의 채무를 대신 변제할 경우 갖게 되는 구상권에 대해서도 정부는 실제 행사하지는 않는 방안에 무게를 싣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이날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재단이 판결금을 대신 갚아준다는 지적이 나올 것'이라는 질문에 "현재로서는 구상권 행사에 대해 상정하지 않고 있다"며 "구상권의 민법상 소멸시효는 10년"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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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역대 내각 입장 계승"
일본도 한국 정부의 해법 발표에 맞춰 역대 일본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고 발표했다.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외상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부는 1998년 10월 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확인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오늘 한국 정부가 발표한 조치는 2018년 대법원 판결로 매우 엄중한 상태에 있는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한 것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이는 피해자 측이 줄곧 요구했던 일본 측의 직접 사죄를 우회하는 방식이다. 박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사죄를 받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라며 "일본이 기존에 공식 표명한 반성과 사죄의 담화를 일관되고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중앙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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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성명 내고 "환영"
백악관은 이날 '한·일 발표에 대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성명'을 내고 환영했다. 백악관은 "미국의 가장 가까운 두 동맹국이 획기적인 협력과 파트너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며 "한·일 정상은 두 차례의 역사적인 외교장관 성명을 통해 보다 안정되고 번영하는 미래를 위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평가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이날 성명을 내고 "민감한 역사적 현안에 대한 한·일의 역사적 발표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한·일 양국 현안에 대해 미국이 대통령과 국무장관 차원에서 즉각 환영 입장을 밝힌 건 이례적으로 바이든 행정부가 인도·태평양 전략의 주축인 한·미·일 협력을 그만큼 중시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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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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