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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제정임 칼럼] 미국 ‘폭스뉴스’ 재판을 주목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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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왼쪽)이 2020년 7월19일 방영된 <폭스 뉴스 선데이>와 인터뷰에서 진행자인 크리스 월러스와 문답을 주고받고 있다. 방송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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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 가해자인 박연진은 “왜 없는 것들은 인생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라며 입꼬리를 비틀어 웃는다. 이 드라마가 폭발적 반응을 얻은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돈의 힘으로 징벌을 피하고 떵떵거리던 악당들이 결국 대가를 치르며 파멸하는 모습을 통쾌하게 보여줬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학교와 경찰이 내팽개친 ‘인과응보의 정의’를 피해자가 사적 복수로 구현한 이야기에 열광하는 우리를 돌아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사법·행정 등 현실의 공적 제도에 관한 불신이 그만큼 커 보여서다.

장르는 다르지만, 미국인들도 ‘사법제도가 과연 인과응보를 구현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한 ‘드라마’를 주시하고 있다. 다음달 시작되는 미국 최대 보수언론 <폭스 뉴스> 대 투표기기 제조사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의 명예훼손 재판이 그것이다. 폭스 뉴스는 2020년 대통령 선거가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패배로 끝난 뒤, 트럼프 진영이 제기한 투표부정 음모론을 사실인 것처럼 보도했다. 특히 도미니언이 소프트웨어를 조작해 선거 결과를 바꿨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내보냈다. 근거는 없었다. 도미니언은 트럼프 지지자들의 협박을 받고, 평판이 추락하고, 투표기기 판매에 타격을 받자 약 2조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등에 따르면 도미니언은 애초 승소를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언론자유를 강력히 옹호하는 미국에서는 언론사에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가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없는 한, 명예훼손 책임을 묻지 않아서다. 실질적 악의의 구성 요소 중 하나는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보도한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어려우니 처벌도 어렵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미니언이 폭스 뉴스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폭스 뉴스 관계자들이 주고받은 이메일과 문자 등을 입수한 것이다.

대주주인 루퍼트 머독과 진행자 터커 칼슨 등 폭스 뉴스 수뇌부와 제작진은 부정선거 주장을 사석에서 ‘미친 소리’ ‘거짓’이라고 말하면서도 방송에서는 사실인 것처럼 떠들었다고 한다. 대선 직후 이 방송이 잠깐 트럼프의 패배를 인정했을 때 트럼프 지지자들이 더 극우적인 매체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시청률과 수익을 위해 음모론을 밀기로 한 것이었다. 심지어 한 기자가 트럼프의 투표부정 주장을 검증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자 터커 칼슨은 “회사 주가를 떨어뜨린다”며 그를 해고하라고 말했다. ‘사업 전략’으로 음모론을 키운 폭스 뉴스는 도미니언만 곤경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점거로 헌정까지 위태롭게 했다고 비판받는다.

수집된 증거를 바탕으로 폭스 뉴스가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지만, 장담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제러미 피터스 뉴욕 타임스 기자는 “배심원 중 한명만 폭스 뉴스 편을 들어도 도미니언이 패소할 수 있다”며 “그러면 아무리 허위정보를 퍼뜨려도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 선례가 되고, 언론사는 ‘거짓말 면허증’을 갖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폭스 뉴스는 막강한 변호사 군단을 동원하고 있다. 피터스 기자는 폭스 뉴스가 이긴다면 “사법제도 자체가 불신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폭스 뉴스는 코로나19 방역을 저해한 보도 등으로도 비난받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지속했다. 다만 이번에는 또 다른 투표기기 업체도 3조원 넘는 손해배상 소송을 냈기 때문에, 패소하면 회사가 존폐의 갈림길에 설 수도 있다.

폭스 뉴스의 인과응보 여부는 미국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한국에도 시청률, 클릭, 광고 수익, 사주의 이해 등을 위해 사실을 비틀고 과장하거나, 명백한 허위주장까지 하는 매체들이 있다. 광고나 사업 협찬 등을 대가로 기업 비리에 눈감아, 독자·시청자를 배신하는 언론사도 있다. 언론사가 ‘거짓말 면허증’을 가질 수 없도록 사법제도가 작동하는 것, 독자·시청자 신뢰 회복을 위해 언론 내부를 개혁하는 일은 한국에서도 절실한 과제다. 안타깝게도 이를 위한 움직임은 아직 충분한 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꼬리 잡힌 여우(폭스)’에게 합당한 인과응보가 내려지는 것이 그 과제를 일깨울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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