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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김유태 기자의 밑줄 긋기] 먹잇감 찾는 고래처럼, 생존과 희망에 허기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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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장편소설 '고래'로 올해 부커상 후보에 오른 소설가 천명관. 【매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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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으로서의 삶을 바라보는 거대하고 슬픈 구라. 거칠지만 천명관 장편소설 '고래'를 이렇게 정의해볼 수 있지 않을까. 2004년 한 문학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한 이 소설이 최근 2023년 부커상 후보로 올라 세계 문학의 중심에 섰다.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가 받은 바로 그 상이다.

소설 '고래'는 정말 고래 같은 작품이다. 천명관은 부커상까지 거머쥐고 세계 독자 앞에서 포효할 수 있을까. 영원한 문제작 '고래'에 밑줄을 그어봤다.

한 추녀 노파의 무질서한 생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날밤 거사를 치르기도 전에 소박맞을 정도로 박색이던 노파는 '평생 땅바닥을 벌레처럼 기며' 돈을 모았고 평대(平代)라는 지역에 국밥집을 차렸다. 세상이 그녀에게 냉혹했듯 노파의 성정도 괴팍해서 노파는 딸의 눈을 불쏘시개로 찔러 애꾸로 만들었다. 어느 날, 딸이 자신의 곰보 서방과 이불 속에 뒤엉킨 걸 확인한 노파는 사내 등에 칼을 꽂는다.

길거리 상거지였지만 영민했던 금복은 노파의 국밥집을 헐값에 인수한다. 국밥집 천장에서 금복은 지전과 땅문서, 노파가 숨겨둔 일확천금을 발견해 횡재한다. 평대다방, 평대운수에 이어 벽돌공장 평대벽와(벽瓦)를 창업한 금복은 오래전에 봤던 대왕고래 외형을 재현한 '고래극장'까지 세운다.

승승장구하던 금복은 노파의 유령, 또 그의 딸 애꾸와 재회하지만 기지와 재치로 난관을 뚫는다. 그러나 어느 날, 고래극장에 대화재가 발생하고 금복도 타 죽는다. 800명을 죽인 방화 용의자로 금복의 딸 춘희가 지목된다. 춘희는 출생 당시 7㎏으로 태어나 14세 때 이미 100㎏를 넘긴 거구의 백치 여성이다. 폭력과 협잡의 교도소에서 영어의 시간을 보내고 10년 만에 출소한 춘희는 이제 벽돌공장 무너진 가마 옆에 서서 먼 곳을 본다. 춘희는 정말 범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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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는 이처럼 혈연과 무관하게 서로 연결된 '여성 3대'를 다룬 작품이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 없도록 흡인력과 중독성이 커 450쪽짜리 소설임에도 서너 시간이면 완독 가능하다. 자학, 근친상간, 살인, 방화, 폭력, 성폭행, 사기 등 범죄 에피소드가 페이지마다 어지러울 정도로 난무한다. 가령 춘희가 처음 등장하면서 이빨로 가죽을 벗긴 누룩뱀의 핏물을 헹구고 한 토막씩 끊어 오래 씹는 장면은 소설 '고래'에 적힌 수천 개 삽화 중 하나일 뿐이다. 섭씨 1000도짜리 에피소드가 페이지마다 절절하다.

미적으로 그로테스크(grotesque)하고, 성적으로 고어(gore)물에 가까운 '고래'의 독자 시선을 자극적 소재를 탐하는 관음증으로 평가절하할 수 없는 까닭은 성(性)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美醜)의 굵직한 주제 덕분이다. 등장하는 여성은 전부 '하위 주체'이지만 금복은 적극적으로 성을 '사용'하는 주체적 인물이 된다. 노파를 다룰 땐 무성영화 변사를 패러디하고 금복의 일화를 이야기할 땐 근대소설체, 춘희와 내면 대화는 '어린 왕자'와 같은 동화적 문체가 쓰이다 보니 '이게 정말 하나의 작품이 맞는가' 하는 의문까지 든다.

'고래' 출간 후 20년간 가장 전통적인 해석은 노파가 전(前)근대사회의 야만과 무작위를, 금복이 근대문명의 질서를, 춘희가 근대 이후의 파멸과 재건을 상징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명관 작가는 현실과 가상을 한데 뒤섞어 놓았다. '남쪽의 장군과 북쪽의 장군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자객을 보냈다'(151쪽)고 적어 냉전기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삼는다. 사실을 허구에 개입시키지만 그 허구를 해석하는 틀이 완전히 다르고, 그 방법이 남미 마르케스식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패러디했다는 점도 자주 거론된다.

작가가 곳곳에 삽입한 명언은 밑줄을 긋게 된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죽음이란 건 별 게 아니라 그저 먼지가 쌓이는 것과 같은 일일 뿐"(10~11쪽), "끝없이 상실해가는 게 인생이라면 그녀는 이미 많은 것을 상실한 셈이었다"(264쪽) 등의 문장은 주제를 함축한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188쪽)는 소설 속 문장은 왜 100㎏도 훌쩍 넘어 몸무게를 가늠할 수 없던 춘희가 체중이 30㎏으로 줄어들기까지 '붉은 벽돌'을 구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함축해낸다.

소설 제목 '고래'는 금복이 압도됐던 거대한 생명체인 대왕고래를 상징한다. 고래는 거대한 체구를 유지하려 끊임없이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유랑하며 수고하는 운명체다. 춘희도, 금복도, 또 비운의 노파도 모두 자기만의 완성되지 못할 대양을 항해하려던 슬픈 운명의 고래는 아니었을까. 소설 '고래'의 부커상 최종 후보 진출 결과는 4월 18일 영국 부커재단 홈페이지에서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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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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