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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정동환 배우 “어렵고 돈 안 되는 연극이 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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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심연 속 뛰어든 정동환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 공연

생의 끝자락 향하던 대작가가

자신 소설 속 주인공 만나는 내용

“만만치 않은 대사 걸으며 암기

쉬운 연극은 안 하는 편이 낫다”

“나의 신념, 당연히 연극이지…”

15년 전 연극 대사 술술 풀어내


한겨레

배우 정동환이 연극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에서 작가 톨스토이를 연기한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정동환은 별도의 분장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극단 ‘피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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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자신이 쓴 소설 속 주인공과 만난다면? 연극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는 이런 상상을 무대에 구현한다. ‘전방위 연기자’ 정동환(74)이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를 맡았다. 단테, 도스토옙스키, 셰익스피어의 대작 연극에 출연한 그가 이번엔 작가의 심연 속으로 뛰어든 것. 지난 18일 연극이 끝난 뒤 분장실에서 만난 정동환은 “길고, 어렵고 돈 안 되는 연극이 내 전문”이라며 웃었다.

지금은 ‘톨스토이역’으로 이름이 바뀐 러시아 아스타포보 간이역. 생의 끝자락으로 향하던 대작가와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정수영)가 텅 빈 대합실에서 막차를 기다리며 대화를 시작한다. 종교적 구원을 탐색했던 톨스토이는 신의 사랑과 구원을 논했고, 끝없이 사랑을 갈구했던 안나는 인간의 사랑에 담긴 위선과 속박을 이야기한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연주가 곁들여진 일종의 ‘음악극’이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핵심 장면을 ‘극 중 극’ 형태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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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과 만난다는 상상을 무대에 구현한 연극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 배우 정동환이 톨스토이, 정수영이 안나를 연기한다. 극단 ‘피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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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희끗희끗한 정동환은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길러 별다른 분장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그는 “연극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이 작품이 그렇다”고 했다. “이 땅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땀을 흘리는 사람과의 융합이다.” 그가 꼽은 이 작품 속 인상적인 대사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같이 잘 사는 게 우리네 삶”이라고 했다.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나진환이 대표로 있는 극단 ‘피악’은 고전 문학 작품을 각색한 실험적 연극을 선보여왔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방인> <악령> <죄와 벌> <단테 신곡-지옥 편> 등이 대표적이다. 하나같이 어렵고 길고 돈 안 되는 작품들이다. 배우 정동환과 정수영은 이 극단의 여러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단짝’이다. 정동환은 이 극단의 차기 작품 <햄릿> 출연도 예약했다.

분량이 길고 메시지가 묵직한 대작 연극이야말로 정동환의 주특기. 2017년, 2021년 두 차례 했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상연 시간이 장장 7시간(휴식 90분 포함)에 이르렀다. 그가 ‘1인 5역’을 맡아 종횡무진하는 이 연극을 보려면 관객도 하루를 몽땅 바쳐야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3배 길고, 1인극 ‘대심문관과 파우스트’에선 나 혼자 2시간 동안 무대를 뛰어다녔죠. 보통 작품의 두세배 값이란 말이죠.”(웃음) 이런 작품들은 분량이 길고 스토리가 뚜렷하지 않은데다 추상적 내용이라 대사 외우는 게 만만치 않다. 이 난관을 해결하는 그만의 비법이 있었으니, 바로 운동과 암기의 병행이었다. “젊었을 땐 뛰거나 산에 오르면서 외웠는데 지금은 걸으면서 암기해요. 요즘엔 집 근처 강길을 산책하면서 소리도 지르고 손짓도 해보면서 대본을 외우지요.”

이제 좀 ‘쉬운 연극’을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차라리 안 하는 편이 낫다”며 “누구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작품은 굳이 하지 않겠다”고 했다. “언제 나가떨어질지 모르는 작품들이에요. 매번 떨어질 것만 같은데 아직 안 떨어져서 그냥 하는 것뿐이죠.” 그는 “낮 공연 끝나고 저녁 공연에서 대사가 안 돼 ‘죄송합니다’ 하며 고개 숙이면 그것으로 끝”이라며 “언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으니,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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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의 한 장면. 극단 ‘피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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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동환에게 연극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을 던지자 그는 520자가 넘는 기다란 분량의 연극 대사를 즉석에서 읊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나의 신념, 당연히 연극이지. 영원히 죽지 않을 유일한 종교거든. (…) 극작가들은 희곡을 아테네의 방패처럼 높이 들어 올렸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만 진실을 볼 수가 있었어. 훌륭하게 빛을 반사하는 거울처럼 관중은 모여들었고 모두 한몸이 되어 그걸 뚫어지게 바라보면 자신들이 위대해지는 것을 느꼈어. 언젠가는 새로운 사도들에 의해 연극이 다시 활활 타오르는 날이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두고 보자는 말이지. 틀림없이 그 사도들 중에 내가 있을 거야.” <에쿠우스> <아마데우스> 등의 작품으로 현대 최고의 극작가로 꼽히는 피터 셰퍼의 희곡 <고곤의 선물>에 나오는 대사다. 2008년 출연한 15년 전 연극 대사를 아직도 막힘 없이 술술 풀어내는 정동환, 그는 천생 배우였다.

정동환은 ‘리듬의 배우’다. 장단이 분명해 대사에 리듬이 흐른다. 그의 대사를 가만히 듣다 보면 구성진 노랫가락도 묻어나온다. “배우가 입을 벌려 소리를 내면 관객에게 다 들려야 해요. 그 의미도 상황에 맞게 전달돼야죠. 그러려면 대사가 리드미컬하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그는 “노래하듯 들린다면 그거야말로 정확히 내가 바라는 바”라고 했다. 그는 ‘천의 얼굴을 지닌 연기자’로도 불린다. 인물의 심연을 들춰내는 연기로 성과 속을 오가고 선악의 저편을 넘나든다. 고전 희곡과 전위적 실험극뿐만이 아니다. 틀에 갇히지 않는 폭넓은 연기로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 작품에도 생기를 불어넣는다. “저는 막노동자 출신이에요. 인생의 여러 경험이 연기에 도움이 됐겠지요.” 그는 공병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일본 오키나와 사탕수수 농장, 미국 뉴욕의 빌딩 청소부로 일했다.

17일부터 다음달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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