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미개한 섬나라’ 일본, 운좋게 ‘벼락출세’해 조선 앞질렀나? [한중일 톺아보기]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인터뷰 7-1] 서울대 역사학부 박훈 교수





매일경제

18세기초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린 ‘조선인래조도’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일본은 역사적으로 줄곧 한반도로부터 선진문물을 전수받았다. 그런 미개했던 섬나라가 메이지 유신으로 운좋게 변신에 성공해 벼락출세했고 부강해졌다. 이때 일본에 뒤처진 조선은 근대화 문턱을 넘지못하고 이후 국권까지 빼앗기는 치욕을 겪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사 입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정말 아깝게 일본에게 뒤처졌을 뿐이고 일본의 성공은 그저 어쩌다 얻어걸린 행운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서울대 역사학부 박훈 교수는 일본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그들을 상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역사, 특히 메이지 유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한국이 몇몇 국력지표에서 일본을 압도할 정도로 성장한 만큼, 이제는 좀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과거를 바라봐야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일본으로 인한 피해와 적개심이 한국 이상인 중국 조차, 역사교과서에 일제의 범죄보다 훨씬 큰 비중을 들여 메이지 유신을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메이지 유신의 전야라 불리는 에도시기 전후, 일본과 조선은 어떤 상황이었고 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박훈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다음은 일문일답.

Q.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의 경제, 군사력 수준은 어땠나?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A: 에도시대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큰 변동이 일어납니다. 전국 시대 이후 17세기를 관통하면서 엄청나게 성장을 하죠. 조선도 어느정도 성장을 하지만 이때 일본의 성장률이 워낙 높다보니 격차가 벌어집니다. 당시는 GDP개념이 없었으니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경제규모에서 최소 2~3배 가량 격차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군사력의 경우엔 말할 필요도 없이 일본이 우위에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은 무사, 사무라이의 나라였던데 반해 조선은 문인, 양반의 나라였죠. 즉, 당시 일본은 전국적으로 50만명에 달하는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군사력이 조선보다 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조선의 경우 병자호란때 청나라에게 패배한 이후 옆에 대적할 수 없는 강국이 만들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무장을 하는게 의미가 없던 측면도 있었고요. 그래서 당시 조선은 거의 국방력을 쓰지 않은 비무장에 가까운 나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더 이전엔 어땠나? 임진왜란이 계기가 된 것 아닌가? 조선서 가져간 성리학, 도자기 등의 영향도 있을 것 같은데.
매일경제

임란때 끌려갔던 조선 도공 이삼평은 일본 도자기 아리타야끼의 시조로서 매년 ‘도자기의 신’으로 기려진다.


A: 그러면 조선시대 이전, 고려시대나 무로마치 막부시대땐 어땠는냐? 이걸 학문적으로 증명하려면 여러가지 사료들이 있어야 되는데 부족하고 연구도 제대로 안 돼 있어서 지금 알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밝혀지고 있는 건 16세기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16세기 전반에서 중반 시기때부터 일본이 급격하게 성장했고 앞서 언급했듯 에도시대때 일본이 훨씬 앞서 있었다는 것 정도 입니다.

임진왜란이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죠. 조선이 괴멸적 타격을 받아 회복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양국간 격차 확대에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결국 조선 영토를 빼앗는데는 실패했으니 큰 도움이 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조선에서 건너간 성리학이 에도시대때 사상적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되고 조선 도공들도 넘어가면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에 큰 영향을 준 것도 맞습니다. 다만 이것 역시 일본 경제의 전체 성장에서 도자기 산업은 일부이기 때문에 이것이 일본 경제 성장 전체를 추동했다고 볼순 없고, 하나의 부분 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에도시대 상업과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출판, 관광산업도 성장했다던데 어느 정도였나?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A: 18세기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율이 높았던 사회였습니다. 당시 유럽이 인구 10만 이상의 도시에 전인구의 2%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5~6%가 살고 있었으니까요. 도시 인구 비중이 높다보니 전업 작가나 전문 출판사가 생겨날 수 있는 소비인구가 있었던 거죠. 소비인구가 많다보니 상업과 화폐경제가 덩달아 발달했던 겁니다. 이것이 당시 조선과 가장 다른점 입니다.

그래서 이때 순전히 상업 논리로만 출판 하고 자생할 수 있는 시장이 널리 확산 되게 됩니다. 베스트 셀러 작가, 전문 소설가가 나오고 책의 대량 생산을 위한 목판 인쇄술도 발전합니다.

또 경제성장으로 촌락이 부유해지다보니 농민들이 레저활동에 나서게 됐습니다. 농한기를 이용해 수십, 수백만명씩 이세신궁까지 여행을 떠나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여행 가이드북도 대량 출판되죠. 이렇게 관광업이 활발해 지는 것 역시 도시가 발전하고 소득이 늘어난 덕분이었죠.

Q. 조선이 상업,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건 성리학 때문인가? 이로인해 망했다고 볼 수 있을까?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A: 그렇게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조선 양반층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부국강병을 배척했으니까요. 일단 부국을 하려면 상업을 해야되는데, 상업이라는 건 빈부격차를 발생시킵니다. 조선의 위정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건 부가 쌓이고 상품과 화폐경제가 발달하면 그 혜택을 고루 보는게 아니라 반드시 빈부격차가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죠. 그래서 하향평준화 되더라도 상업을 억제하려고 했던 거고요. 다같이 적당히 생산해서 적당히 나눠 먹는 게 좋다는 철학속에서 상업은 필요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게 좋다고 봤으니까요. 상업이 억제되니 당연히 화폐경제는 나올 수가 없었죠.

사실 성리학은 굉장히 광범위한 사상체계 입니다. 그 안에 실학도 있죠. 성리학의 이런 특정부분, 이용후생이라는 경제정책과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면을 매우 강조했던 사람들이 실학자 입니다. 실학을 도외시하고 도덕적 수양 같은 것만 강조하는 측면도 성리학에 있고요.

다만 조선의 경우 실학적 측면이 약했고 고담준론, 도학적 측면에만 집중 하다 보니까 부국강병에 적절히 대처 못한 측면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이 망국의 큰 원인 중 하나인 것은 맞습니다.

Q.성리학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파됐는데, 일본엔 어떤 영향을 미쳤나?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A: 성리학이 일본에서 행한 역사적 역할은 조선과는 꽤 다릅니다. 일본에서 성리학은 에도시대 들어 확산되기 시작했는데요. 일본은 조선보다 훨씬 더 철저히 세습적이고 혈통적인 신분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성리학은 수양을 중시해서 군자가 되려면 누구나 책을 열심히 읽고 공부를 해야했습니다. 고귀한 신분이어도 과거를 붙어야 정치가가 되고 위로 올라갈 수 있었죠. 어떻게 보면 능력주의적 측면이 있었던거에요. 에도시대까지는 일본에서 관료는 세습으로 되는 것이었는데, 메이지 시대 들어와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게 됐습니다. 능력주의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영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거죠.

또 성리학에 따르면 천황이 왕이 돼야 했습니다. 막부의 쇼군이라는 건 무력으로 집권 한 사람이니까 왕이 되면 안되는 거였죠. 그래서 메이지 유신때 쇼군에서 천황으로 왕정이 복고된 건 성리학적으로 환영 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성리학이 당시 존왕사상의 뿌리로서 일본의 막부체제를 끝내고 왕정 복고에 역할을 했던겁니다. 봉건제 였던 일본을 바꾸는데도 일조했죠. 단일한 왕 밑에 만민으로 통일된 사회가 성리학적 이념에 부합했으니까요. 그래서 일본의 경우 성리학이 메이지 유신에 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Q.아시아에서 왜 일본만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A: 앞서 언급했듯, 에도시대 높은 도시화율과 빠른 경제성장을 요인으로 꼽을수 있습니다. 막부가 있었던 에도는 인구가 100만 이었는데 한양이 25만 정도 였으니 4배 정도 됐던 거죠. 오사카, 교토 전부 인구가 30만이 넘었고 주변에 인구 5만∼10만 정도의 조카마치(城下町·영주의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도 즐비했습니다.

이렇듯 많은 인구가 밀집해 살다보니 위생을 위한 상하수도 라든가 질서, 규율 같은 근대적 요소들이 쉽게 배양될수 있었던 거죠.

또 근대라는 건 전쟁속에서 태어나는 측면이 있는데요. 이걸 ‘밀리터리 레볼루션’이라고 하는데 유럽도 수많은 전쟁을 거치며 재정 국가가 만들어지고 부국강병책이 만들어지고 중상주의가 채택되면서 근대화를 이룩한 겁니다. 일본은 에도시대 장기간 전쟁은 없었지만 사무라이 지배 체제가 계속됐기 때문에 군대문화 특유의 효율성, 경쟁 같은 근대적 덕목이 스며들기 좋은 환경이었죠.

이런 객관적 조건들에 더해 결국은 정치 주체의 문제가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중심세력인 하급 사무라이들이 유럽 근대국가를 모델로 사회개편을 해야한다는 아주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단결했습니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밀고 나갔죠.

예컨데, 메이지 유신하면 항상 언급되는 사카모토 료마 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해군과 무역을 양성해야 된다는 것이었어요. 1860년대 조선에서는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20대 청년 료마는 일본의 살길이 해군과 무역에 있다는 점을 정확히 알고 실현하려 한겁니다.

Q. 조선에게는 기회가 없었나?
매일경제

구한말 조선 내정 간섭을 주도했던 이홍장(왼쪽)과 위안스카이.


A: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이들이 말하자면 ‘조선판 메이지 유신’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특히 김옥균 그룹을 중심으로 조선에서도 꽤 유능한 개화파들이 1880년대 들어 많이 성장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갑신정변이 너무 서두른 면이 있어서 결국 수구파들에게 일망타진 당하죠. 청나라 위안스카이가 들어와서 정변을 진압하고 이후 거의 10년 동안이나 조선에서 통감처럼 군림 합니다. 이때 개화파 인사들이 전부 소외당하는 등 개화세력이 큰 타격을 입습니다.

조선이 위안스카이와 결탁하던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갑신정변같은 혁명을 성공시켰다면 제일 좋은 시나리오였을 겁니다. 불행히 그러지 못했고 청과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서 맞붙으면서 전쟁이 발생하죠.

1880년경부터 1894년 청일전쟁 발생 전까지 약 15년간이 조선에겐 기회의 시기였습니다. 1876년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했을때의 일본은 아직 조선을 침략할 만한 국력이 없었습니다. 일본이 그런 의사와 능력을 갖춘 시점은 1890년대 들어서였으니까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민씨 정권이 무너지고 10년 동안이나 소외됐던 개화파 인사들이 다시 등용되면서 갑오개혁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이때 정치적 기반은 일본 군대였습니다. 때문에 민심을 얻는데 상당한 장애요소가 됐고 개화파 자체도 매우 분열된 상태였죠.

Q.지금 우리가 왜 메이지 유신을 살펴봐야하나?
매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A: 요즘 일선 학교에서 국사만 가르치고 예전보다도 세계사를 더 안가르치죠. 세계사 중에서도 특히 일본사는 일본이 밉다보니 배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미우면 미울수록, 또 경쟁심을 느끼면 느낄수록 상대를 더 많이 알아야 됩니다. 메이지 유신은 현재 일본을 만든 시작점이고, 그들이 가장 큰 혁신을 이뤘던 시기죠. 때문에 그때 그들에게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또 왜 우리는 그러지 못했는지에 대해서요. 큰 변화와 위기가 닥쳤을때 어떻게 반응하고 극복할 것인지, 그 지혜를 참고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저는 비단 한국인들 뿐 아니라 요즘 일본인들도 메이지 유신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일본인들과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인들은 완전히 다른 종자처럼 보이거든요.

그동안 우리나라가 잘 해왔지만, 지금 세계적으로 매우 엄중한 시기고 우리도 큰 기로에 놓여있죠. 이를 돌파해 낼 수 있는 길은 결국 자기실력을 기르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메이지 유신을 포함해 되새길 만한 세계사적 사실들을 한번 진지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성취한 것들을 잘 보존하고 더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회에선 ‘일본이 최근 수십년 쇠퇴의 늪에 빠져 있는 이유’에 대한 박훈 교수의 의견을 들어봅니다. 하단 기자페이지 ‘+구독’을 누르시면 쉽고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 영상과 자세한 내용은 매일경제 월가월부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