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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주연 같은 특급 조연, 봄날의 미역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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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신애의 이달의 식재료 미역

의외로 맛 내기 어려운 미역국

가자미·홍합 등 더하면 근사해

찬물에 불려 식감·질감 살리기


한겨레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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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쇼핑에서 산모에게 좋은 식품이라며 미역을 판매한다. 한반도에서 언제부터 미역을 먹기 시작했는지 찾아보면 멀리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 고려 사람이 고래가 새끼를 낳은 뒤 미역을 먹으며 쉬는 모습을 보고 처음 미역을 먹기 시작했고 그 뒤 산후조리 음식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에는 고려 시대 왕이 왕자에게 미역밭(곽전)을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여전히 우리는 생일에 미역국을 먹고 아기가 태어난 집에 미역을 선물한다.

미역은 말린 것을 주로 사용하기에 1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식재료이지만, 자연산 미역의 제철은 이맘때다. 미역의 맛은 오묘하다. 미끄러우면서 부드럽지만 씹히는 식감이 있고 또 고소하면서 쌉싸름하고 새콤한 맛과 향도 있다. 다채로운 맛을 가진 미역인데 그 자체론 좀 부족한 것인지 으레 미역국 앞에는 다른 식재료가 수식어로 붙는다. 가자미미역국, 쇠고기미역국, 홍합미역국 등등. 분명 미역국인데 미역은 주인공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주연을 능가하는 특급 조연인 것 같다.

어른들은 미역국 끓일 때 늘 ‘맛있는 간장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데, 다른 부가재료 없이 미역과 좋은 간장만으로도 충분히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라는 뜻일 것이다. 미역국에 미역이 없다면 재료 사이에 연결고리도 없다. 흐르는 국물 속 촘촘한 그물처럼 쇠고기와 국물을 연결하는 것이 미역이다. 국물에 무게감을 주고 건더기가 더 많아 보이도록 하며 질감 자체를 실크처럼 부드럽게 유지한다. 미역은 맛뿐 아니라 식감으로 먹는 음식이기도 하다.

미역국은 흔한 음식이지만 잘 끓이기가 은근히 어렵다. 일단 미역을 불려야 하는데 이것부터 만만찮다. 무심코 미역 한 봉지를 싱크대에 넣고 불렸다가 불어난 미역이 싱크대에 차고 넘쳐 낭패를 봤다는 얘기는 흔하다. 그래서 요즘은 실수를 줄이기 위해 소포장으로도 유통된다.

미역은 찬물에 불려야 맛있다. 찬물에 천천히 불어나면 오독오독한 식감과 매끈한 표면이 주는 질감이 살아난다. 반면 더운물에 불리면 끈적이면서 잘 끊어진다. 차가운 바다에 사는 생물의 특징이다. 잘 불린 미역의 물기를 빼고 참기름을 넉넉히 두른 냄비에 넣고 볶는다. 불은 너무 세지 않게! 불린 미역에서 나온 물과 참기름이 합쳐져 미역에 다시 스며든다. 고소한 향이 나고 미역 색이 잠시 밝아진다. 인내심을 가지고 뒤적이며 볶다 보면 바닥이 마른다. 이때 조선간장과 참기름을 약간 더해준다. 맛있는 조선간장이 기름과 열을 만나 단맛을 내뿜는다. 미역도 덩달아 달아질 때 즈음 물을 붓는다. 쇠고기를 넣을 거면 물을 붓기 전 간장과 함께 넣어 잠시 볶고, 홍합이나 가자미를 넣는다면 물을 부을 때 같이 넣자.

찬물과 함께 들어간 해산물은 서서히 열을 받으면서 순순히 본연의 맛을 물에 녹인다. 이제부터는 시간과 불의 싸움. 마늘의 톡 쏘는 맛을 더하고 싶다면 마지막에 작은 숟가락으로 한술 정도만 넣어준다. 마늘을 많이 넣고 싶다면 볶을 때부터 넣고 같이 익혀준다. 파를 같이 넣어도 좋다. 보통 파는 미역과 어울리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맛 때문이 아니라 파의 유황과 인 성분이 미역의 칼슘 흡수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음식 궁합 안내는 참으로 친절하지만 파 없는 미역국을 먹으며 파김치를 곁들인다면 또 의미가 없지 않나. 실제로 일본식 우동에는 삶은 미역과 파가 같이 들어가기도 한다.

얼마 전 부산 기장에 다녀왔다. 아직은 바람이 차기에 미역 조업을 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는데 어부님들은 “기장에서도 예전만큼 미역 농사가 잘 안된다”고 하셨다. 수온 상승으로 미역 생산량 자체가 줄어서 이젠 예전의 그 기장 미역이 아니란다. 우리가 지구를 잘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는 바다와 육지 곳곳에서 속속 나타난다. 미역 따위 없어진다고 뭐가 아쉽겠냐고?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워주는 도구가 아니다.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식문화 저변이 밑동부터 허물어지고 있다는 걸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홍신애 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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