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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마약, 납치, 성폭행…‘아이티 폭력’ 그 많은 총은 어디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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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구정은의 현실지구

‘만성 재난국’ 아이티


한겨레

지난 3일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의 벨에르 지역에서 한 아버지가 학교에 갔던 아이를 안고, 범죄조직에 맞서 작전을 수행 중인 경찰 곁을 지나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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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만성화’되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그곳을 떠난다. 특히나 세계의 200개 가까운 나라 가운데 가장 가난한데다 이렇다할 자원조차 없고 ‘전략적 중요성’도 없는 나라라면.

중미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 섬 반쪽을 차지하고 있는 아이티. 전쟁통도 아닌데 폭력 때문에 피란민이 생기고 농부들이 밭을 버릴 지경이 된 이 나라 사정이 딱하다며 유엔이 연일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아이티의 갱조직들이 설쳐대면서 올들어 530명 넘는 이들이 숨졌다고 전했다.

2021년 7월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피살된 뒤 아이티의 행정기능은 마비됐다. 이달 초 유엔마약범죄사무소 발표를 보면, 아이티에서 활동하는 주요 범죄조직은 150~200개로 추산된다. 콜롬비아산 코카인과 자메이카산 대마초가 아이티를 거쳐 미국과 캐나다로 가는데, 그 이권을 놓고 다투던 범죄조직들이 지금은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60%를 장악했다.

폭력 사태로 학교나 가게도 툭하면 문을 닫는다. 연초부터 260건 이상의 납치사건이 발생했는데, 갱들이 아이들을 조직원으로 키우려 학교에까지 쳐들어간다. 여자아이들을 잡아다 성폭행하고 가족에게 몸값을 요구하기도 한다. 유엔에 따르면 ‘어떤 사회에서도 본 적 없는 수준의’ 성폭력이 자행되고 있고 폭력을 피해 집을 떠난 난민이 16만명에 이른다.

유엔이 밝힌 올해 아이티에 필요한 긴급 지원금은 7억1500만달러, 2010년 대지진으로 20만명 이상이 숨졌던 때 이후 최대 규모다. 300만명 넘는 이들이 구호에 매달려 살아간다. 하지만 돈보다 더 시급한 게 ‘안전’이다. 유엔은 상황이 통제불능에 이르렀다면서 치안군을 보내달라고 국제사회에 외치고 있다.

식민 통치 뒤 가해자·피해자 바뀐 배상


아이티는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다. 아프리카에서 붙잡아간 노예들을 부리는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들이 있어서 한때는 프랑스 ‘제국’을 위해 엄청난 부를 생산했다. 1791년 대규모 흑인 반란이 일어났다. 세계 최초로 흑인 노예들의 독립 공화국이 수립됐다. 역사적인 혁명의 대가는 가혹했다. 섬은 피로 물들었고 잿더미가 됐다. 독립을 쟁취했지만 백인들이 운영하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사라지자 돈벌이 수단이 없었다.

프랑스는 그 나라에 거액의 배상금을 물렸다. 노예로 수탈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노예들의 독립으로 손해를 본’ 백인들에게 배상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1825년에 배상금이 정해졌는데 학자들 분석으로는 당시 아이티 국민소득의 3배에 이르는 액수였다. 아이티는 이 돈을 프랑스인들에게 물어주기 위해 5%의 이자를 내고 돈을 빌렸고, 갈수록 늘어나는 빚의 악순환에 빠졌다. 프랑스 학자 토마 피케티는 <자본과 이데올로기>라는 저서에서 신생 독립국을 극단적 빈곤으로 몰아간 배상금 횡포를 꼼꼼히 짚었다.

식민지 시절 만들어진 착취형 경제구조에 피해자에게 덮어씌운 가혹한 노예해방 배상금 빚이 출발부터 아이티의 발목을 잡았다. 20세기로 넘어와서 아이티의 역사는 더더욱 꼬였다. 지난 100여년 아이티에 심각한 상흔을 입힌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1915년 아이티를 점령했다가 1934년에야 물러났다. 이후 이 섬나라는 파파독, 베이비독이라는 부자 세습 독재정권(뒤발리에 가문)에 휘둘렸다. 아버지가 죽은 뒤 겨우 19살이었던 아들이 종신 대통령직을 물려받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뒤를 봐준 덕이었다. 쿠바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미국은 아이티를 ‘원조’했다.

독재자가 1986년 쫓겨나고 아이티 민주화 운동이 세계에 알려지자 미국은 이 나라를 중미의 ‘민주주의 모범생’으로 만들어 선전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꿨다. 하지만 민주화된 아이티인들이 선택한 지도자는 가톨릭 성직자 출신인 좌파 정치인이었고 이내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1990년대 초반 난민들이 보트를 타고 미국과 중미 국가들로 향했다.

2004년 정정불안이 재연됐다. 그 때부터 2017년까지 유엔 평화유지군이 아이티에 머물렀다. 공식 명칭은 유엔 아이티 안정화임무단(MINUSTAH). 2010년 대지진이 일어나 유엔군이 그 뒤처리도 맡았다. 유엔 소속 네팔군 부대에서 콜레라가 퍼지는 바람에 난리가 났고, 지금까지 콜레라가 반복되고 있지만 어쨌든 재난 뒤 폭력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막았다.

당시 아이티를 돕자며 미국이 나서 항모까지 보내자 남미의 좌파 지도자들은 군사점령의 과거사를 들며 비난했다. 하지만 가장 꼴사나웠던 것은 “미국의 역할은 아이티를 돕는 것이지 점령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프랑스가 불평했던 일이었다.

지진 뒤 아이티로 돈이 몰렸으나 외국 건설업체 등으로 많이 흘러갔고 인프라로 쌓이질 못했다. 가난은 그대로이고, 2021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400달러에 불과하다. 유엔군이 떠난 뒤로 치안은 물 건너갔고 저격수와 갱단과 성폭행범들이 판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크라이나 관심의 ‘100분의 1’이라도


아리엘 앙리 총리가 제발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지는 벌써 반년이 돼 간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차원의 파병 이전에 어느 나라든 ‘신속대응군’ 형태로 지원해달라고 지난해 10월 요청했다. 그럼에도 아이티에 신경쓰는 나라들은 많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쏠린 시선의 100분의 1조차도 아이티로 향하기는 힘들 것 같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협조를 얻어 유엔 차원의 임무단을 파병할 가능성은 적다. 그래서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비유엔 국제 치안 지원 임무’를 제안하는 안보리 결의안을 만들고 있다. 과거 지은 죄 때문에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이 뻔하기에 이번 임무는 캐나다군에 주도권을 주겠다고 했지만 캐나다의 반응은 쌀쌀했다.

한 군데 기댈 곳은 브라질이다. 5년 전 활동이 만료되기 전까지 유엔군에 20개국 출신 총 7200명이 거쳐갔는데 주력은 브라질군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브라질 지도자는 남미 맏형 역할을 되찾으려 하는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이다. 룰라 집권 전에 유엔에서 아이티에 대한 논의는 미국과 멕시코, 에콰도르 등등이 주로 해왔는데 이제는 브라질이 나설 공산이 크다. 다만 룰라 정부가 집권하자마자 남의 나라 파병부터 할지는 미지수다. 마우루 비에이라 브라질 외교장관은 연초 영국 <가디언> 인터뷰에서 “군대를 보내는 게 해결책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안타까운 것은 그러는 동안 계속되는 아이티의 폭력사태다. 이 가난한 나라에서, 납치하고 성폭행하고 강도짓하는 갱들의 총은 어디에서 올까. 이달 초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 발표를 보면, 아이티의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불법 총기류는 50만정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총기와 탄약의 주된 공급원은 미국이다. 총기 규제가 느슨한 플로리다 같은 곳에서 밀매된 무기가 아이티로 향한다. 미국에서 400~500달러에 팔리는 무기가 아이티에서는 1만달러에 거래된다. 지난해 10월 유엔 안보리는 아이티에 무기를 들여보내지 않도록 부분적 금수조치를 담은 결의안을 채택했으나 실효는 미지수다.

가난과 건강의 관계를 파헤친 미국 의사 폴 파머는 아이티를 가리켜 “급성이자 만성인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그 재앙의 어디까지가 미국 탓, 프랑스 탓이고 어디까지가 아이티인들의 잘못인지 잘라말하긴 힘들다. 그러나 재앙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누가 아이티에 손을 내밀까.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

신문기자로 오래 일했고,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10년 후 세계사> 등의 책을 냈다.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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