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22일 오전(현지시각) 김용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담당 비서 겸 정치국 후보위원(사진 오른쪽 얼굴 보이는 이)이 뉴욕 주유엔 미국대표부에서 아널드 캔터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과 사상 첫 북-미 고위급회담을 하려고 승용차에서 내리고 있다. 미국은 ‘김정일의 남자’ 김용순을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
북핵과 주한미군 문제를 논의했던 1992년 북한과 미국의 첫 고위급 회담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외교문서가 6일 공개됐다.
이날 외교부가 공개한 문서는 30년이 지나 비밀해제된 자료들로 36만쪽 2361권 분량에 달한다. 이중 일부 문서에 1992년 1월22일 뉴욕 주유엔 미국대표부에서 열린 북-미 고위급 회담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한 핵 사찰 관련 내용이 담겼다. 분단이후 처음 열린 북-미 고위급 회담이었다.
문서엔 북한과의 첫 고위급 회담에 나선 미국이 한국에 전한 반응도 있었다. 1992년 1월 김용순 당시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과 미국 아널드 캔터 국무부 정무차관이 나눈 회담 결과, 미국은 ‘북한이 주한미군의 존재를 안정의 요소로 인정하고, 북핵과 관련해 미국을 포함하는 3자 사찰도 수락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전했다. 줄곧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온 북한이 1992년 북-미 고위급 회담에서 주한미군의 존재를 “안정의 요소”로 인정했다는 주장을 학자들이 한 적은 있지만, 외교 문서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외교부가 6일 공개한 1992년 외교 문서. |
회담 두달 뒤인 같은해 3월 이상옥 외무장관과 리처드 솔로몬 미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차관보의 면담에서도 북핵 사찰과 관련한 대목이 등장한다. 이 자리엔 당시 장관 특별보좌관이었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동석했다. 1991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와 핵 안전조치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고, 이듬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하면서 핵 위기도 잠시 누그러지는 듯 한 시점에서 미국이 참여하는 3자 사찰에 응할 뜻도 내비친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장관은 “3자 사찰 참여문제는 계속 협의가 필요할 것이며 아직 시간이 있다고 본다”는 입장을 밝혔다.
회담 성사를 위한 중국 개입을 주문하는 미국 쪽 요청도 있었다. 솔로몬 차관보는 당시 면담에서 “중국은 북한 핵개발에 큰 이해를 갖고 있는 나라”라며 “한국이 한중수교와 관련, 중국과 협상시 이를 직접 중국에 거론하는 것이 중요하다. (러시아 외무장관) 코지레프와의 면담에서도 이를 거론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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