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1992년 노태우 극비 방일 ‘서해사업’ 추진
한달뒤 정상회담… 이듬해 ‘고노 담화’ 이끌어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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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1992년 ‘서해사업’이란 이름으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방일을 비밀리에 추진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악화된 한일 관계 속에서도 정부 차원에선 일본과의 소통 강화에 나선 것. 이후 서해사업은 노태우 대통령과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총리 간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이듬해 고노 요헤이 일본 관방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최초로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외교부는 6일 이러한 내용이 담긴 36만여 쪽 분량의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1992년 10월 14일 이상옥 외교부 장관은 오재희 주일본 대사에게 노태우 대통령 방일 추진 계획 및 날짜 확정 등 조치를 지시했다. ‘서해사업’이란 제목의 2급 비밀 전보를 통해서였다.
‘서해사업’은 시작 한 달 뒤인 11월 교토(京都)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 후 종료됐다. 교토 회담 후 국내에선 정부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정부는 “격식 없이 쉽게 자주 만나는 새로운 정상외교의 관행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일본은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1994년에는 일본 고교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술이 포함됐다. ‘서해사업’이 한일 관계 진전에 기여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번 외교문서 공개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때 양국 협상 대표가 이 협정으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까지 해결되는 건 아니란 공감대가 있었단 사실도 드러났다. 협정 체결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었던 민충식은 1991년 8월 한 국제포럼에서 “당시 교섭 대표 간에도 청구권협정은 정부 간 해결을 의미하며 개인의 권리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인식의 일치가 있었다”고 전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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